아파트 자치관리기구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아파트 보수를 위해 적립한 특별수선충당금(현 장기수선충당금·이하 충당금)을 아파트 구조 진단 견적비 및 변호사 선임료 등 다른 목적에 썼더라도 입주민의 포괄적 동의가 있었다면 업무상 횡령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아파트는 각 가구 내부를 제외한 외벽, 지붕, 계단실, 지하주차장 등 공용 부분은 공동 관리해야 한다. 주택관련법령(옛 주택법·현 공동주택관리법 등)이 정한 공동주택(아파트) 관리 기구에는 입주자대표회의(대표회의)와 관리 주체(관리사무소)가 있다.
대표회의는 입주민들이 선출한 동대표들로 구성되고 회장은 동대표 가운데서 선출하며, 아파트 공동관리 주요 사항에 대해서는 관리규약에 정해진 바에 따라 동대표 회의에서 의결해 집행한다.
대법원 형사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2월 15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소된 대표회의 회장 A씨에게 벌금 100만 원 선고를 유예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전주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2013도14777).
A씨가 대표회의 회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한 아파트는 1개 동 103가구로 구성됐으며 관리사무소가 따로 없었다. 대표회의는 2002년 12월 31일 전북 익산시로부터 구조안전상 보강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와 관련해 건설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대표회의는 법원이 정한 감정인의 구조 진단 보고서가 입주민에게 불리한 내용으로 작성됐다며 2005년 8월 16일 법원에 재감정을 신청하면서 부족한 소송비용을 충당금에서 우선 지출한 후 원상회복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A씨는 2005년 12월 29일 충당금 계좌에서 구조 진단 견적비 명목으로 1000만 원을 사용하는 한편, ‘새로운 변호사 선임 비용 중 부족분은 충당금에서 우선 사용한다’는 2007년 9월 15일 대표회의 결의에 따라 10월 5일 실제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900만 원을 지출했다.
결국 A씨는 관리규약에서 정한 용도가 아닌 구조 진단 견적비 및 변호사 선임비 등으로 충당금 1900만 원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돼 업무상 횡령으로 기소됐고 1, 2심은 “A씨가 충당금을 관리규약상 정해진 용도 외 목적으로 사용했다”며 유죄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 재판부는 “횡령죄의 구성 요건인 ‘불법영득의사’는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유자(입주민)의 이익을 위해 처분한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정되지 않는다. 충당금은 원칙적으로 용도 외 사용이 제한되지만, A씨가 입주민들로부터 포괄적인 동의를 얻었기 때문에 위탁의 취지에 부합하는 용도에 충당금을 사용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대표회의의 자금 집행과 관련된 분쟁이 끊이지 않자 관리규약에만 있었던 ‘충당금’의 용도 제한 규정을 2013년 6월 4일 개정된 주택법(공동주택관리법)에 신설했다. ‘입주자대표회의 및 관리 주체는 충당금을 이 법에 따른 용도 외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공동주택관리법 제43조의 4 제2항)가 바로 그것.
이번 대법원 판결은 A씨가 충당금을 용도 외 목적으로 사용한 이유가 아파트를 위한 것인 데다 대표회의 결의에 따른 조치였다는 점에서 불법영득의사가 없다고 보고 무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개정 주택법에서는 충당금 용도가 엄격하게 규정돼 앞으로는 용도 외 목적으로 충당금을 사용할 경우 무죄가 선고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