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력은 고급 영어를 하는 사람에게 큰 재산이 된다.
처음엔 출근길 중간에 위치한 작은 학원 단과반에 등록해 새벽 공부를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 약간 적응되자, 좀 더 체계적인 과정을 밟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퇴근길에 집 가는 길목에 자리한 연세대와 서강대 부설 어학당에 차례로 다니기 시작했다. 실질적인 영어 공부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초교 6년과 중고교 6년, 도합 12년 개근에 빛나는 이력을 바탕으로, 병원에 응급 상황이 없는 한 학원 수업에도 빠진 적이 없다. 정해진 어학당 수업 외에도 매일 잠들기 전 잠자리에서 영문을 반드시 일정 분량 읽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당시 애독하던 책은 영어 잡지 한글판인 ‘리더스다이제스트’였다. 작은 크기에 영어와 함께 한글 번역문을 일목요연하게 대비해놓아 잠자리에서 읽기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추후 아쉽게도 이 잡지의 한글판 발행이 2009년 중단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잠들기 전 영문 읽기
거의 매일 밤 ‘리더스다이제스트’에 나오는 문장을 외다시피 하다 보니 어학당 수업 시간 중에도 비슷한 투의 표현을 종종 구사했다. 그 때문일까. 처음에는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어휘력을 높이 평가했던 원어민 강사가 어느 날 개인적으로 “미스터 김이 말하는 걸 들으면 어쩐지 평론 책을 그대로 읽는 것 같은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꼬집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긴 했어도 회화 중심의 공부를 통해 새로운 각도에서 영어 실력이 향상되는 즐거움을 느껴갔다. 수준도 점점 올라가 레벨 테스트를 거쳐 중급 조금 아래 단계에서 시작했던 것이 어느덧 최종 단계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독해 중심 공부에선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듣는 것만으로는 ‘P’와 ‘F’ 발음 차이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나 자신이 발음할 때만 의식적으로 차이를 둬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런 약점은 과거 독해 중심의 영어 공부에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실제 듣고 말하는 회화에선 중요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Th’ 발음도 그랬다. 혀를 이로 무는 동작이 어색하고 쑥스럽게 느껴져, 익숙해질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공부해나가면서 일단 말하고 듣기에 어느 정도 적응하자 그간 열심히 해왔던 단어 공부가 큰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생활영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매일 하는 대화가 기껏해야 인사나 날씨에 대한 이야기, 길을 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외국어를 제대로 구사한다는 것은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공자, 맹자 철학은 물론 바퀴벌레, 해파리, 개나리 같은 동식물 이름까지 모두 그 나라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진정한 의미의 외국어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닐까.
또한 모르는 단어는 절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듣기에서도 그동안 축척된 어휘력이 빛을 발하면서 청취 테스트에서 눈에 띄게 우수한 성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 나름대로 영어 준비를 마치고 1989년 가족과 함께 미국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로 1년간 연수를 떠났다. 해외여행 자체가 난생처음이던 터라 환승하려고 로스앤젤레스(LA) 공항에 도착했을 때 혹시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항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야! 이건 지금까지 배운 영어의 현장 실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감이 붙었다.
미국 현지에서의 생활은 전공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어 공부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시기였다. 한국에서 꾸준히 한 영어 공부가 그곳에서 날개를 달아가는 느낌이었다. 한 번은 유타대 아파트촌 앞 잔디밭에 앉아 이웃에 사는 미국인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이야기 초반 자못 현학적 분위기를 과시하던 이웃은 대화 중 뜻하지 않은 내 단어 실력에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제 나름 일격을 가하고 싶었는지 어려운 논리학 용어인 ‘denotation’(外延·외연)을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바로 반대말 ‘connotation’(內包·내포)을 말하자, 그는 순간 혀를 내두르는 시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표현 능력 부족과 논리성 오해
미국 연수 시절 김원곤 교수.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한때 외국인 강사 중에 한국인은 말할 때 논리가 부족해 보인다고 비꼬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사실 이는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를 표현할 영어 단어 능력이 부족한 것뿐인데, 엉뚱하게 해석하는 그들이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들이 한국어로 우리와 논리를 따지며 차원 높은 논쟁을 벌이는 게 가능할지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얻어야 할 한 가지 교훈은 전체적인 영어 구사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지만, 단순히 단어 몇 개를 몰라서 전체 지식이나 논리성이 떨어진다는 오해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공자’ ‘논어’를 국제 공용어인 영어로 ‘Confucius’ ‘the Analects of Confucius’로 표현할 수 없다면 아무리 아는 게 많아도 이를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영어에 대해 소정의 결실을 안겨준 1년간의 미국 장기연수는 그렇게 지나갔다. 1990년 귀국한 후 개인적 일상에 변화가 있었다. 먼저 94년부터 직장을 모교인 서울대로 옮겨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로 재직하게 됐다. 그 밖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꾸준히 영어 공부를 이어나간 것 외에 외국어 공부 측면에선 별다른 변화 없이 어느덧 2003년을 맞이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