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시험 준비생(공시생)이 모인 서울 노량진과 신림동 고시촌 분위기는 최근 더 싸늘해졌다. 3월 23일 경찰공무원시험 1차 필기시험 결과가 발표됐고 4월 8일에는 9급 공무원 공개채용 필기시험이 있었다. 가채점을 끝내고 고시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올해 9급 공무원 공개채용 시험의 경쟁률은 35 대 1. 올해가 지나고 공무원증을 목에 걸 수 있는 응시생은 100명 중 3명에 불과하다. 합격은 점점 어려워지지만 공시생은 쉽게 공무원시험을 포기하지 못한다. 공무원이 안정적 삶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기 때문. 수험공부 기간이 너무 길어져 공무원시험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진 수험생들도 있다. 최근에는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해 수험공부 기간이 길어진 공시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발생했다.
노량진, 신림동 할 것 없이 고시촌은 지대가 높을수록 조용하다. 수험공부 기간이 긴 수험생일수록 학원과 먼 높은 지대의 고시원에 살기 때문. 누구보다 합격이 절실한 사람들인 만큼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밖에 나오지 않아 골목에는 인적이 드물다.
“마음 졸이지 않는 삶을 위해”
“이곳에 살다 보면 주위 사람의 얼굴을 익히지 않으려 애쓰게 돼요. 눈에 익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면 ‘또 한 명이 합격해 나갔나 보다’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지거든요”노량진 고시촌 골목에서 만난 이모(34) 씨의 말이다. 그는 3년째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 이씨가 남들보다 늦게 공무원시험에 뛰어든 이유는 그동안 직장에 다녔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도 소재 2년제 전문대를 졸업하고 중소기업 사무직으로 2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이씨는 “중소기업 1~2년 차 사원이 받는 월급과 공무원 1~2년 차가 받는 월급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업무시간은 차이가 크다. 처음에는 컴퓨터 보안 관련 직군으로 입사했지만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나중에는 재고 확인 같은 업무도 맡았다. 일이 많아 아침 8시까지 출근해 밤 10~11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고된 일보다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제때 나오지 않는 월급이었다. 그는 “입사 후 1년이 지나자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급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월급 체불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당시 체불된 급여는 뒤늦게 받았고 다른 중소기업에 취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한 대가를 제때 받지 못하고 각종 공과금, 월세 등이 통장에서 인출되는 날 잔액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생활을 다시 하기가 싫었다”며 공무원시험에 뛰어든 계기를 밝혔다.
2월 16일 온라인 취업 사이트 사람인이 대학생, 구직자, 직장인 등 성인남녀 102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44.1%가 올해 공무원시험을 치를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신분별로는 대학생의 58.3%, 구직자 의 51.4%가 공무원시험 응시 의사를 밝혔다. 직장인도 39.4%나 응시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씨에게 수험공부 기간 중 가장 힘든 점을 묻자 “때늦은 후회인지 모르겠지만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할걸 그랬다”고 말했다. 이씨는 “학창 시절 기본 독해력과 공부하는 습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인지, 공부하는 방법을 잡는 데만 1년이 걸렸다”고 했다.
3년째 공무원시험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무슨 직업을 갖든, 어디에서 일하든 실업이나 급여에 대한 불안이 항상 있는데 공무원은 유일하게 그 불안에서 자유로운 직업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시험 준비만 3년째라 모아놓은 돈도 거의 다 떨어져 최근에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배수진을 친다는 생각으로 공부해 돌아오는 시험에는 꼭 합격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어”
신림동 고시촌에서 생활하는 김모(28·여) 씨는 끼니를 대부분 3500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부모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다. 김씨가 7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한 지는 올해로 2년째. 김씨는 “대학 졸업반까지는 공무원시험 응시를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고 했다. 2013년 경기 소재 4년제 대학 인문계열 학과를 졸업한 김씨는 4학년 2학기부터 졸업 후 1년을 포함해 총 1년 6개월간 대기업 공채에 도전했다.김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순진했다. 학벌보다 실무 능력을 보겠다는 각 기업의 얘기를 철석같이 믿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토익 점수는 900이 넘고 대학 생활 내내 기업 및 공공기관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홍보단 활동 등을 해온 데다 공모전 수상 경력도 있었지만 서류 통과조차 어려웠다. 간혹 서류와 인·적성검사를 거쳐 면접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열심히 준비했고 대답도 잘했다. 그러나 기업이 선택한 사람은 면접 내내 말을 더듬던 서울 소재 명문대 출신 지원자였다. 150곳 넘게 지원했지만 나를 써주는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결국 내 학벌로는 대기업 취업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고 고용이 불안정한 중소기업 계약직으로 들어가는 건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학벌과 무관하게 시험 성적으로만 합격이 결정되는 공무원시험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공시생이 됐다”고 밝혔다.
대다수 공시생은 공무원시험이 일반 기업의 채용시험보다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3월 31일 발표한 ‘2017 진입경로별 공무원시험 준비 청년층 현황 및 특성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공시생 응답자 687명 중 68.9%가 공무원시험이 사기업 채용에 비해 기준이 명확하고 과정도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씨는 지난해 말 필기시험을 통과했지만 면접에서 아쉽게 탈락한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씨는 “오랜만에 필기시험을 통과했는데 면접 후 불합격 통보를 받으니 쉽게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일주일을 고시원에서 소리도 못 내고 울다 자다를 반복했다.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연락할 수도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1년 반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는데 낙방했다고 하소연하기가 민망했다”며 당시 심경을 밝혔다.
하지만 김씨는 공무원시험 준비를 그만 둘 마음이 없다. 그는 “최근에는 서울 4년제 대학 학생들도 취업이 어려워 공무원시험에 뛰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취업시장에 나갔다가는 과거의 반복일 뿐”이라고 말했다.
공시생 가운데 일부는 대학을 졸업한 지 오랜 시간이 흘러 어쩔 수 없이 공무원시험을 계속 보는 경우도 있다. 서울 한 시립도서관에서 만난 정모(32·여) 씨는 “공무원시험 말고는 이제 취업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한탄했다. 정씨는 올해로 5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
서울 유명 4년제 대학에서 사회과학계열 학과를 졸업한 정씨는 처음에는 행정고시 준비로 공무원시험에 발을 들였다. 1차 시험에는 몇 차례 합격했지만 2차 시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수험공부 3년째가 되는 2014년 7급 공무원시험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그러나 역시 2년째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돌아가기는 너무 늦었어요”
그는 “부모님이 올해까지만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야속했지만 5년째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지해준 만큼 부모님도 힘들게 내린 결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준비해온 것이 아깝기는 하지만 최대한 빨리 취업하고자 부모님에게 말씀드리고 내년에는 9급 공무원시험에 응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정씨가 9급 공무원으로 목표를 변경한 건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시험 준비를 오래 해 대기업 입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한국의 청년 채용시장 분석’을 발표했다. 대기업 인사담당자 100명을 설문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졸업 후 3년이 지나면 아무리 정량적 스펙이 좋아도 서류전형 통과 가능성이 7.8%에 불과했다. 정씨는 “나이와는 별개로 수험공부를 오래 해 수험 내용 외에는 문외한에 가깝다. 어차피 이제 와 일반 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것은 어려울 터”라고 말했다.
공무원시험에 뛰어든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정씨는 “시간을 되돌려 대학 시절로 돌아간다면 행정고시가 아니라 7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할 것 같다. 일반 기업에 계약직으로 입사하는 건 고용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공무원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