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경제학부 복수전공 ‘학점 컷’이 4.0 이상이었다고 들었어요. 학점 받기 힘든 공대생한테는 거의 기회가 없는 거죠.”
한 서울대 공대생의 얘기다. 그는 “입학 전엔 경제학을 복수전공해 ‘무적 스펙’을 쌓으려 했는데 1년 다녀보고 꿈을 접었다”고 했다.
‘학점 컷’은 특정 전공에 ‘진입’하려면 획득해야 하는 마지노선을 뜻한다. 서울대 각 학과는 매년 해당 학과 3학년 정원의 100%까지 복수전공생을 선발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제학부·경영학과·언론정보학과 등 인기 학과는 늘 지원자 수가 모집 인원을 초과한다. 이때 학점을 기준으로 당락이 갈린다.
‘평균 학점 4.0’은 A+(4.3)에서 F(0)까지 13개 등급으로 학점을 부여하는 서울대에서 전 과목 A0 이상을 받아야 가능한 성적이다. 한 서울대생은 “인기 학과 복수전공에 안정적으로 합격하려면 1, 2학년 때 학점 평균을 4.1 정도는 만들어놓아야 한다. B학점(2.7~3.3) 과목이 하나라도 있으면 사실상 불가능한 점수”라며 “그래서 ‘스펙 관리’에 관심 많은 학생은 입학 직후부터 아는 선배 등에게 학점 따기 좋은 강의를 추천받아 수강신청을 한다”고 밝혔다.
대학 진학 후에도 끝없는 경쟁, 경쟁
최근 서울대가 학사관리위원회를 열어 학생들이 타 학부(과) 전공과목을 이수할 경우 ‘A~F’학점 대신 ‘S/U(Satisfactory(及·급)/Unsatisfactory(落·락))’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해 화제다. ‘급락제’라 부르는 이 제도는 그동안 서울대에서 체육실기 등 일부 교과목에 적용돼왔다. 학생이 해당 과목이 요구하는 기본 조건을 충족하면 S, 그렇지 않을 경우 U를 부여하고, S/U 평가를 받은 과목은 학점 평균 계산 시 제외하는 게 골자다. 서울대가 이를 일부 전공과목에까지 확대 도입하려는 배경에는 과도한 학점 경쟁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김기현 서울대 교무처장(철학과 교수)은 “요즘 많은 학생이 학점 스트레스 때문에 대학에서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지 못한다. 다른 학과 전공수업을 듣는 건 아예 시도조차 못 하는 게 현실이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낮은 학점을 받으면 회복이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융·복합 인재’를 양성하겠나. 교수로서 학생에게 말로만 ‘벽을 넘어서라’고 하면 안 되겠다, 그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에 ‘타전공 급락제’ 도입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빠르면 올해 2학기부터 타전공 급락제가 시범 운영될 전망이다.
서울대 학생들에 따르면 서울대에서 학점 경쟁이 본격화한 건 2000년대 초반 ‘광역모집제’가 시작되면서부터다. 당시 서울대는 학과 구분 없이 단과대별로 신입생을 선발했다. 세부 전공은 1년간 학교를 다닌 뒤 선택하게 했다. 제도 시행 초기엔 이 선발 방식이 정착되면 학생들이 대입시험 점수에 맞춰 원하지 않는 전공을 선택하는 사례가 줄고, 전공 간 교류가 확대돼 학문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학생들이 사회적 인식이 좋거나 취업에 유리한 학과 쪽으로 몰리면서 부작용이 불거졌다. 특히 전공 배정 시 학점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면서 신입생들이 입학과 동시에 학점 경쟁에 뛰어들었다. 한 서울대 학생은 “당시 학점 0.1점 차이로 희망 전공 진입 여부가 결정됐기 때문에 수강신청 때 눈치 보기가 극심했다고 들었다. 전교생 필수과목인 ‘대학국어’를 3, 4학년 때 수강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아무래도 학점 취득에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대는 이후 성적에 관계없이 지원자 모두가 희망 전공을 택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꿨다. 하지만 이번에는 특정 전공에 학생이 몰려 기초학문 분야가 고사 위기를 맞았다. 이에 따라 현재는 인문대를 제외한 모든 단과대가 과거 ‘학과별 선발제’로 돌아간 상태다. 인문대의 경우도 수시선발전형에 이른바 ‘전공예약제’를 도입했다. 이 제도를 통해 특정 전공을 선택하기로 약속하고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은 입학 후 다른 전공으로 옮길 수 없다. 단, 취업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경계열을 복수전공 또는 부전공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경우 다시 ‘높은 학점’이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졸업생 절반이 ‘우등상’ 수상
지난해 인터넷 취업정보 사이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전국 대학생 40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5.1%가 현재 복수전공을 하고 있었다. 복수전공을 하지 않는 학생 가운데 71.7%는 향후 복수전공을 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수전공을 하고 있거나 하려는 이유는 ‘취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52.5%)가 가장 많았다.취업시장에서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서려고 입학 후 전공을 바꾸는 ‘전과’를 택하는 학생도 많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2013학년도에 전과를 한 학생 수는 1만1293명이다. 그런데 2015학년도에는 1만4723명으로 30%가량이 늘었다. 전과생이 가장 많이 몰린 분야는 경영 및 경제계열(3899명·26.5%)이었다.
고교생을 대상으로 진학상담을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 등에는 ‘한국 사회에서는 대학 이름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일단 명문대에 입학한 뒤 학점을 잘 받아 유망 학과로 전과하거나 복수전공하는 걸 노리라’는 조언이 넘쳐난다. 특히 전과는 원전공 기록이 남는 복수전공과 달리 아예 학적이 바뀌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전공세탁’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전과를 허용하는 인원은 모집단위별 입학 정원 20% 이내이기 때문에 이 안에 속하려면 역시 학점 경쟁을 치러야 한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 서울대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진학 열풍이 불면서 학점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분위기다. 한 서울대 출신 로스쿨 준비생은 “요즘 전국 로스쿨 정원의 절반 이상을 서울대 출신이 차지한다. 학점이 낮으면 서울대 출신이라도 합격이 어렵다. 학생들이 선호하는 명문대 로스쿨은 성적표에 A- 이하 학점이 있으면 서류전형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서울대를 졸업한 학생 중 64.2%가 평균 평점 ‘A학점(4.0)’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운영하는 대학 정보 공시 사이트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이는 서울시내 주요 11개 대학 가운데 최고 비율로, 가장 낮은 중앙대(33.5%)의 2배 수준이다. 2015년에는 서울대 졸업생 중 45%가 우등상을 받은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높은 학점을 ‘만들기’ 위해 서울대에서는 다양한 ‘스킬’이 공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고교 시절 치열한 입시경쟁을 통과한 서울대생답게 시험 전 강의 내용을 ‘달달’ 암기하는 건 기본이다. 이혜정 전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 교수는 2014년 서울대생 1213명을 심층 조사한 뒤 ‘서울대에서는 수업시간에 교수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쓰고, 자신의 생각보다 교수 생각에 맞춰 시험 답안을 작성하는 학생의 성적이 더 높다’는 내용의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에 ‘플러스알파’도 있다. 한 서울대생은 “상대평가를 실시하는 대다수 과목은 A, B학점 비율이 70% 이하로 정해져 있다. 이 비율을 대부분 A+, B+로 채우는 교수의 수업은 학점 평균을 높이기에 유리해 인기가 높은 편”이라고 밝혔다. 중간고사를 망쳐 좋은 학점을 받기 어려운 경우 아예 수강신청을 철회하거나 기말고사에서 0점을 받아 C+ 이하 학점을 받은 뒤 재수강을 하는 것도 널리 알려진 방법이다.
이 때문에 일부 로스쿨은 최근 학생들에게 등수가 적힌 성적증명서를 요구하고, 자기소개서 등에 ‘재수강 과목과 재수강 이유’를 적도록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같이 높은 학점을 가진 지원자 사이에서 ‘진짜 실력자’를 골라내려는 방편이다. 한 서울대 인문대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취업과 로스쿨 진학에 가장 유리한 서울대가 이 정도면 다른 학교의 학점 경쟁은 얼마나 치열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낭비”라고 말했다.
대학 교육 정상화 첫걸음 될까
서울대의 ‘타전공 급락제’가 과연 이러한 학점 경쟁 해결의 첫걸음이 될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서울대 교내 언론인 ‘대학신문’에 따르면 학생들은 도입 취지에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경영학과 등 인기 학과 전공과목에 수강신청이 몰리거나, 수업의 질이 지금보다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한 서울대 학생은 “해당 전공 학생들이 좋은 학점을 받으려고 몰두하는 수업 현장에 S/U 평가를 적용받는 다른 과 학생들이 몰려 들어오면 아무래도 수업 분위기가 나빠지지 않겠나”라고 했다.이런 부작용을 막으려고 서울대는 일단 해당 학과에서 다른 전공자도 들을 수 있도록 지정한 과목에만 ‘타전공 급락제’를 적용할 계획이다. 또 이를 활용해 이수할 수 있는 학점도 재학 중 최대 9학점까지로 제한할 방침이다. 김 교수는 “먼저 작은 규모로 시범 실시해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살핀 뒤 확대 또는 개편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학생들이 경계를 뛰어넘는 창의적 인재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번 발 디디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결심을 망설이게 하고, 알지 못하는 것들을 향하여 날아오르느니 차라리 지금의 고통들을 견디며 살게 만들지. 조심성으로 머뭇거리다 우리는 모두 겁쟁이가 돼버려.’
김 교수가 다양한 학문적 탐색을 주저하는 서울대 학생들을 설명하며 언급한 희곡 ‘햄릿’의 독백 부분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미국 일부 대학에는 학생들이 이런 고민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미국 브라운대는 모든 과목마다 수강생이 A, B, C 등 ‘등급제’를 바탕으로 학점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S(Satisfactory)와 NC(No Credit)로 평가받을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미국 하버드대 학생들도 학부과정에서 S/U 평가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단 1, 2학년은 한 학기에 최소 3과목 이상을 등급제(A~F)로 수강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전공과목 급락제가 국내 대학 문화를 바꿀 수 있을지 많은 이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