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입 ‘자기주도학습 전형’을 대비한 캠프가 인기다.
“빨리 꿈부터 정하라” 재촉
“갑자기 자기주도학습 전형이라니,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사는 주부 신모 씨는 한동안 허탈감에 빠졌다. 내년부터 고입제도가 바뀐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다. 중학교 2학년인 그의 딸은 과학고를 준비하고 있다. 전형이 바뀌면서 수학 올림피아드 등 그간의 수상 경력이 모두 소용없어졌다. 신씨는 “안타깝지만 정신 차리고 바뀐 전형에 맞춰 입시를 준비 중이다. 대학에서 주최하는 과학 캠프와 발명 관련 학원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주부 김수연 씨는 갈등 중이다. 중2인 그의 아들은 외고 진학을 희망한다. 외고에 가려면 영어인증시험부터 한국어능력시험, 한국사시험 등을 섭렵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새로운 입시 전형은 정반대다. 인증제는 인정하지 않고 영어 과목 내신과 비교과 활동으로 평가한다. 김씨는 “외부 수상 경력 등을 반영하지 않는다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계속 준비하고 있다. 거기에 자기소개서·학습계획서 쓰기 수업을 추가해 오히려 부담이 늘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임기 초부터 MB정부는 ‘사교육 없는 학교’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자기주도학습 전형의 목적은 이 슬로건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간 과고와 외고를 비롯한 특수목적고(특목고) 준비는 사실상 사교육이 담당했다. 과고 지망생은 영재교육원과 올림피아드, 외고 지망생은 영어인증시험 등을 위해 학원가로 몰려들었다.
교과부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전형을 파격적으로 단순화했다. 각종 수상 실적을 배제하고 면접에서는 인성 관련 질문만 하게 했다. 과고는 수학·과학, 외고·국제고는 영어로 내신 반영 과목 수도 줄였다. 줄곧 고입제도 전형을 담당해온 교과부 정제영 사무관은 “이 전형은 특별 선발이 없어 특목고가 제도를 악용할 소지를 없앴다. 지원자들은 충실히 학교생활을 하면서 본인의 목표에 맞는 독서와 경험을 쌓으면 된다. 특히 올해는 교육청 관계자가 입학사정관으로 모든 과정에 참여하고, 전형 결과를 감사해 평가하기 때문에 교과부 가이드라인만 따르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반신반의다. 다시 정책이 뒤집어지지 않을까, 남들은 금지 항목을 티 나지 않게 활용하지 않을까 불안하다. 무엇보다 문제는 어디서도 명쾌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것. 서울 을지중학교 3학년 이수열 학생 어머니는 “학부모들이 입시 대비법을 마련하기 위해 입시설명회를 다니느라 바쁘다. 하지만 주장하는 대비법이 천차만별이고, 어디를 가도 속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사교육을 일부 포기하고 내신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준비하는 엄마가 많다”고 말했다.
“목표부터 정하라는 것도 모호하다”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박수옥 씨는 최근 중3인 아들과 자주 대화하려 애쓴다. 주로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누거나 뉴스를 보면서 의견을 묻는다. 이렇게 하면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은 물론 면접과 토론대회에도 대비할 수 있다. 하지만 진로를 고민할 때면 늘 안타깝다. 박씨는 “나는 약사인데 아들은 PD직에 관심 있다. 모르는 분야를 물어오면 충분히 답변해줄 수 없어 속상하다”고 말했다.
“교과부나 학교에서는 책을 읽고 목표를 정하라고 하는데, 그건 한계가 있다. 부모나 교사가 도움을 줘야 하지만, 마땅한 멘토를 찾기 힘들다. 목표를 정하는 것 자체도 문제다. 그맘때 아이들은 꿈이 수시로 변하지 않나. 그걸 미리 정해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라는 것은 인위적이라고 본다.”
학교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교내 수상 기회를 늘리고 관련 과목을 개설하라는 학부모의 요구가 많아졌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을지중학교 학생들은 최근 ‘을지플래너’와 ‘독서통장’을 늘 손에 쥐고 다닌다. 을지플래너는 학습 계획과 실천 여부를 기록하는 일종의 다이어리이고, 독서통장은 읽은 책과 감상을 기록하는 용도다. 다소 귀찮기도 하지만 자기주도학습 전형에서 ‘증거’로 활용될 여지가 높고, 공부 습관에 도움도 된다. 을지중은 또 외부 전문강사가 자아 성찰, 목표 세우기, 독서 습관, 스스로 공부법 등을 가르치는 방과 후 수업도 개설했다.
교과부 못 믿어 학원가 찾는 학부모들
강남구 대치동의 A중학교는 최근 토론, 글짓기, 영어 말하기, 영어 토론 등 교내 경시대회를 추가했다. 참가 학생도 전체, 반 대표, 지원자 등으로 다양화해 응시 기회를 넓혔다. 또 방과 후 학교에 독서토론반과 리더십 강좌를 개설하고, 독서기록장 관리도 강화했다. 이 학교 교사 B씨는 “특목고 진학 실적을 중시하는 학교 대부분이 독서와 학습 계획을 위한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진학지도법. 1차 서류전형에서는 학생부와 교사추천서가 주요 변수다. 교사들은 지금까지 나온 방침이 두루뭉술해서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 을지중 과학교사 홍세기 씨는 “스펙이나 포트폴리오 준비를 많이 해야 하는데, 몇 년에 걸쳐서 해야 하는지, 1년 만에 해도 되는지 감이 안 잡힌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교과부 관계자는 “지도 매뉴얼을 충분히 숙지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밝혔다.
“학생들이 학교생활에 충실한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교사는 책임과 부담이 커졌다. 학생의 활동을 꼼꼼히 기록해야 하는데, 진정성 판단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독서감상문은 본인이 쓸 수도 있지만 외부에서 베낄 수 있는 것이니까.”
전형이 발표된 뒤 중학생 대상 학원가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형 종합학원에서 동네 보습학원으로 옮기는 학생이 늘었다. 종합학원의 강점은 특목고 준비반과 풍부한 진학 정보. 그러나 전형이 간소화되고 비교과 영역 비중이 커지자 보습학원에서 내신을 관리하며 체험활동에 전념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에 학원들은 컨설팅 위주의 자기주도학습 프로그램을 내놓으며 생존을 위해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다.
중계동에 사는 한 주부는 최근 중2 아들과 함께 컨설팅을 받았다. 면접관이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콘셉트’가 궁금해서다. “아이가 외고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컨설턴트는 연습장에 도표를 그리며 일사천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외교관이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외고를 희망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외고에서 영어나 프랑스어를 전공한 뒤, 명문대 정치외교학과에 가서 외무고시 보겠다는 것을 큰 줄기로 잡자. 거기에 영어 관련 캠프 참가, 학교 영어 특별반 활동 등을 살로 붙여야 한다. 독서 이력에는 외교관의 자서전이나 세계여행 책자를 넣어라.”
자기주도? 컨설턴트가 주도!
학부모들의 불안 심리를 틈타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인기다. 학습계획서 만들기, 비교과 관리, 필요 내신 맞춤관리 등의 수업이 대표적이다. 자기주도학습법을 가르치는 일종의 정신교육식 캠프도 성행한다. 소규모 입시설명회도 눈에 띄게 늘었다. 심지어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공부 스케줄을 알려주고, 공부 모습을 찍어 교사에게 전송하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자기주도학습 전형의 취지와 달리 이번에도 시장은 컨설턴트가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정책 의도대로 자녀를 믿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 학부모도 많다. 자녀가 하나고등학교를 지망한다는 한 학부모는 “자기주도 계획의 본질은 인생 계획이라고 본다. 학원을 줄이고 자유시간 늘리면서 변화를 줬더니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고 “실패를 해도 본인이 노력한 과정은 의미 있는 시간으로 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입제도의 향배는 올해 전형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 이는 교과부만의 힘으론 불가능하다. 일선 교사는 학생 개개인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학부모는 그간의 불신을 털고, 해당 고교는 공정하게 학생을 선발하는 노력이 보태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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