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무 씨는 6·25 당시 미 8군 심리전과에 배속돼 심리전요원으로 활동했다.
“미 극동군사령부(FECOM) 산하 주한연락처(KLO·일명 켈로부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퇴각하던 1950년 말부터 51년까지 ‘토끼(rabbits)’라 불린 여배우들에게 공작원 교육을 해 중서부 전선에 투입했다. 이들은 적 장교들과 성관계를 맺거나 동거하면서 군사기밀을 빼내 전황이 혼탁한 틈을 타 아군 쪽으로 넘어와 정보를 전달했다.”(조선일보 2000년 2월 10일자 31면)
적 상공에서 대북방송 임무
기사 한쪽에는 ‘립스틱 바르는 첩보요원’이란 제목으로 한 여성이 립스틱을 바르는 사진이 실렸고 사진 아래에는 “6·25 때 활약했던 한 특수공작원이 적진 후방에 침투하기 전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마지막으로 입술 화장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사진 속 인물은 영락없이 정보 수집을 했던 켈로부대 여성 비밀공작원으로 묘사됐다.
김씨는 다시 한번 기사 속 사진을 살펴봤다. 보고 또 봐도 그는 분명 전우였던 김광자 육군중사였다.
“연약한 여성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 상공에서 심리전 방송을 했는데… 국가로부터 훈장도, 아무런 보상도 없었는데 이렇게 모욕적인 대접을 받다니….”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김씨는 1·4후퇴 직전인 1950년 12월 고향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왔다. 큰형과 작은형이 반동분자로 몰려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북쪽에 있기가 어려웠다. 남으로 온 그는 군대에 지원했다. 부산에서 훈련받고 일선 부대에 배치된 그는 이후 미 8군 심리전과(voice of UN)에 배속돼 미 5공군(당시 K-16 여의도 비행장)으로 파견을 나가 심리전 요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의 부대에는 군인 10명(남군 6명, 여군 4명)과 군무원 7명(남자 6명, 여자 1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남자는 C-47 또는 C-48기를 타고 삐라(전단)를 살포하고, 여자는 B-26기로 적 상공에서 방송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특히 여성 군무원은 중공군을 겨냥해 중국어 방송을 했다. 김광자 중사는 마타하리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활약한 심리전 요원이었다.
참전용사인 김 중사가 왜 ‘한국의 마타하리’로 소개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타하리는 말레이어로 ‘새벽의 눈동자’라는 뜻.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스파이로 활동하다 프랑스에서 반역죄로 총살당한 여성 스파이를 가리킨다. 김 중사는 1999년에 별세했고, 그와 함께했던 전우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난 뒤라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고 진실을 알리는 것은 온전히 김씨의 몫이었다. 그는 서둘러 6·25전쟁 당시 심리전을 다룬 ‘들리지 않던 총성 종이폭탄’의 저자 국방대 이윤규 교수에게 e메일을 보냈다. 이 교수의 책에도 김 중사 사진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저서 43쪽에 실린 여성은 육군중사 김광자 씨이고, 130쪽에 전단을 장입하는 사람은 군무원 이재용 씨입니다. …위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당시 삐라 약 300장과 air medal 수여장 사본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한국판 마타하리 실체 의심
이 교수의 소개로 5월 28일 충남 서산시 태안군 안면읍에서 김씨를 만났다. 그는 평생 보관한 자료를 꺼내며 6·25 때 김 중사와 활동했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때 찍은 사진, 김 중사의 활약을 증명하는 자료 및 심리전에 동원된 각종 전단을 보여주면서 김 중사가 마타하리가 아니라 참전용사임을 증언했다.
“저와 김 중사는 심리전 요원으로 근무했습니다. 6·25 때는 북한 상공으로, 휴전이 되고 나서는 지리산 상공으로 300여 회 출동해 삐라를 살포했습니다.”
▲6·25 당시 김영무 씨가 전우들과 찍은 사진 및 그가 살포한 삐라(전단). ▶김광자 중사는 김영무 씨와 함께 심리전 요원으로 활약한 참전용사였다. 그를 스파이로 묘사한 언론보도.
이 ‘태양의 전사들’을 국내 한 군사전문가가 ‘x: 세계의 특수부대, 비밀전사들’이란 책에서 재인용했고, 언론은 이를 검증 없이 그대로 소개했던 것이다. 이 교수는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평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너무나 충격적이고 분노가 치미는데, 위국 헌신한 당사자와 참전 동료들의 심정은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한국판 마타하리가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남로당 간부인 이강국에게 비밀정보를 전하고, 지명 수배돼 쫓기던 이씨를 이북으로 도피시킨 혐의로 처형된 김수임 사건도 6·25가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다. 다만 6·25 당시 미군 고위 퇴역장교들에 의해 남한 여배우들이 대북 첩보전에 동원됐다는 증언이 있었을 뿐이다.
‘태양의 전사들’의 저자이자, 예비역 공군대령으로 미군에서 특수전 전문가로 활약해온 마이클 해스 씨의 증언이 대표적이다. 해스 씨는 2000년 8월 한국을 방문해 오산 미 공군기지에서 한 강연에서 “한국의 영화계 및 극단 여배우들이 6·25 당시 미군에 의해 스파이로 선발돼 북한의 고급 군사기밀을 빼내오는 역할을 맡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사실무근이며, 미군 장성이 자신의 책을 팔려고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반대 주장도 만만치 않다. 종전 직후 1955년부터 5년간 육군첩보부대에 근무했던 박경석 한국군사평론가협회 회장(예비역 장성)은 “한국판 마타하리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근거가 불분명한 미군 측 주장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처럼 한국판 마타하리의 존재 자체가 논란거리인 상황에서, ‘한국판 마타하리’로 알려진 고 김광자 중사의 억울한 사연에 전우였던 김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한 전우가 적에게 몸까지 바친 부정한 여자로 묘사되니 참담합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잘못 알려지고, 잊힌 진실이 얼마나 많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