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5일은 6·25전쟁이 일어난 지 60주년 되는 날이다. 북한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최종 합의할 때까지 3년여간 지속됐다. 그 기간에 230여만 명의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민간인 10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900여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6·25는 세계 전쟁사에서 극도로 비참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된다.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면서 6·25는 기억 저편의 전쟁이 되고 말았다. 6·25를 직접 경험한 이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요즘 10, 20대 젊은 세대는 장동건·원빈 주연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어렴풋이 6·25를 느꼈을 뿐이다. 6·25를 남한이 일으킨 전쟁으로 잘못 알고 있거나 전쟁의 책임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천안함 침몰사고에서 보듯 6·25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전쟁’이다.
엄격히 말해 한반도는 휴전(休戰), 말 그대로 전쟁을 잠시 쉬고 있을 뿐이지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호시탐탐 각종 군사도발로 남한을 전복하려는 북한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 6·25는 ‘평화는 평화로울 때 지켜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큰 울림을 우리에게 남긴다.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이 발견됐다. 1953년 휴전 협상 직후 한국국제보도연맹이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란 3년사(3 YEARS’ HISTORY OF KOREAN WAR)’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 대한민국공보처, 국연군사령부 등과 AP 등 외신이 제공한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6·25전쟁 3년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책 전체가 일본어로 쓰인 점이 특징인데 재일동포에게 이날의 비극을 잊지 말자는 뜻을 전하고, 일본 국민에게 이웃의 처참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듯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책은 비단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에게 의미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6·25가 점차 잊히는 현실에서 진정 이 책을 일독해야 하는 사람은 2010년도를 살아가는 우리다.
1 북한 공산군의 남침 소식에 민중은 집도, 가재도구도 남겨둔 채 식량과 옷가지만 가지고 대동강을 건너고 있다. 공산당의 압제를 피해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민 행렬이 꼬리를 문 채 이어지고 있다.
2 전쟁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에 수도 서울은 폐허가 됐다. 건물은 무너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속출했다. 1950년 9월 28일 연기로 자욱한 남대문 거리.
3 연합군과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했다. 1950년 10월 20일 공산당의 통치에서 해방된 평양 시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반기며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환영기념식에 참가하고 있다.
1 절망 속에서 유엔군의 참전 소식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영국, 캐나다, 터키 등 16개국 참전용사들은 이국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영하 20℃의 혹한 속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태국군.
2 중공군의 참전으로 연합군은 대규모 퇴각을 하게 됐다. 그 결과, 서울을 다시 공산진영에 빼앗기는 1951년 1·4후퇴가 발생했다. 연합군이 평양에서 철수하자 이를 따라서 대동강을 건너는 피란민들.
3 중국군 참전으로 전선의 교착상태가 이어지면서 어느 한쪽도 군사적으로 완전히 승리할 가능성은 없어졌다. 한 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한강전선에서 활약 중인 통신부대. 무참한 공격으로 폭파된 한강철교 너머로 서울시내가 보인다.
4 군사적 승리에 대한 불확신, 미국 내부에서의 전쟁에 대한 전략 수정, 소련의 긴장완화 요구 등이 작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전을 위한 협상이 진행됐다. 2년여의 공방 끝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대표 해리슨 중장(왼쪽)과 공산당 측 대표 남일이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있다.
5 인천상륙작전 승리로 반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해 통일을 눈앞에 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물거품이 됐다. 연합군의 맹공격을 받고 패주하는 북한군 속에 끼어 1950년 11월경부터 중공군이 현재 전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진 속 인물은 중공군 제4 야전사령관 린바오.
6 한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유엔 측에서 굴욕적인 휴전협정을 맺으려 하자 국민적인 휴전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동덕여중·고 학생들이 ‘통일 없는 휴전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7 1953년 8월 8일 오전 10시, 역사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 합의. 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의 돈독한 우방으로 거듭나고, 막대한 경제적 원조를 얻게 됐다. 사진은 이 조약문에 서명하는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미국의 덜레스 국무관.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면서 6·25는 기억 저편의 전쟁이 되고 말았다. 6·25를 직접 경험한 이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요즘 10, 20대 젊은 세대는 장동건·원빈 주연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어렴풋이 6·25를 느꼈을 뿐이다. 6·25를 남한이 일으킨 전쟁으로 잘못 알고 있거나 전쟁의 책임을 미국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천안함 침몰사고에서 보듯 6·25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전쟁’이다.
엄격히 말해 한반도는 휴전(休戰), 말 그대로 전쟁을 잠시 쉬고 있을 뿐이지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호시탐탐 각종 군사도발로 남한을 전복하려는 북한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 6·25는 ‘평화는 평화로울 때 지켜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큰 울림을 우리에게 남긴다. 6·25전쟁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이 발견됐다. 1953년 휴전 협상 직후 한국국제보도연맹이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란 3년사(3 YEARS’ HISTORY OF KOREAN WAR)’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 대한민국공보처, 국연군사령부 등과 AP 등 외신이 제공한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6·25전쟁 3년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책 전체가 일본어로 쓰인 점이 특징인데 재일동포에게 이날의 비극을 잊지 말자는 뜻을 전하고, 일본 국민에게 이웃의 처참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듯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책은 비단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에게 의미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6·25가 점차 잊히는 현실에서 진정 이 책을 일독해야 하는 사람은 2010년도를 살아가는 우리다.
1 북한 공산군의 남침 소식에 민중은 집도, 가재도구도 남겨둔 채 식량과 옷가지만 가지고 대동강을 건너고 있다. 공산당의 압제를 피해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민 행렬이 꼬리를 문 채 이어지고 있다.
2 전쟁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에 수도 서울은 폐허가 됐다. 건물은 무너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속출했다. 1950년 9월 28일 연기로 자욱한 남대문 거리.
3 연합군과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했다. 1950년 10월 20일 공산당의 통치에서 해방된 평양 시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반기며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환영기념식에 참가하고 있다.
1 절망 속에서 유엔군의 참전 소식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영국, 캐나다, 터키 등 16개국 참전용사들은 이국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영하 20℃의 혹한 속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태국군.
2 중공군의 참전으로 연합군은 대규모 퇴각을 하게 됐다. 그 결과, 서울을 다시 공산진영에 빼앗기는 1951년 1·4후퇴가 발생했다. 연합군이 평양에서 철수하자 이를 따라서 대동강을 건너는 피란민들.
3 중국군 참전으로 전선의 교착상태가 이어지면서 어느 한쪽도 군사적으로 완전히 승리할 가능성은 없어졌다. 한 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한강전선에서 활약 중인 통신부대. 무참한 공격으로 폭파된 한강철교 너머로 서울시내가 보인다.
4 군사적 승리에 대한 불확신, 미국 내부에서의 전쟁에 대한 전략 수정, 소련의 긴장완화 요구 등이 작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전을 위한 협상이 진행됐다. 2년여의 공방 끝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대표 해리슨 중장(왼쪽)과 공산당 측 대표 남일이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있다.
5 인천상륙작전 승리로 반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해 통일을 눈앞에 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물거품이 됐다. 연합군의 맹공격을 받고 패주하는 북한군 속에 끼어 1950년 11월경부터 중공군이 현재 전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진 속 인물은 중공군 제4 야전사령관 린바오.
6 한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유엔 측에서 굴욕적인 휴전협정을 맺으려 하자 국민적인 휴전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동덕여중·고 학생들이 ‘통일 없는 휴전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7 1953년 8월 8일 오전 10시, 역사적인 한미상호방위조약 합의. 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의 돈독한 우방으로 거듭나고, 막대한 경제적 원조를 얻게 됐다. 사진은 이 조약문에 서명하는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미국의 덜레스 국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