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결혼을 하면 행복할까.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결혼을 해서 더 낫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결혼을 후회하는 사람도 꽤 있고, 어떤 이는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내비치면서 독신으로 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이런 사람 중 상당수는 결혼하면 결혼 예찬론자가 된다).
결혼의 중요성에 대해 물어보면 남성과 여성의 대답엔 차이가 있다. 과거엔 여성의 인생에서 결혼은 매우 중요한 목표이자 출발점이었다. 반면 남성이 청첩장을 돌리면 결혼 선배들은 어깨를 툭툭 치며 “결혼은 무덤이야”라고 엄숙하게 귓속말을 하지만, 대부분 가볍게 여겼다.
‘정절’ 강조하면 ‘노땅’ 취급
2009년 11월26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혼인빙자간음죄(이하 혼빙간죄)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혼빙간죄란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하는 죄’를 말한다. 헌법재판소는 위헌결정의 근거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국가 스스로 부인하고 남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들었다. 여기에 “오늘날 보호의 실효성이 현격히 저하된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들만의 ‘성행위 동기의 착오의 보호’로서 그것이 침해되는 기본권보다 중대하다고는 볼 수 없다”는 정말 어려운 복문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과거 여성은 정조 관념을 중요하게 여겼다. 아니, 여성보다 사회, 더 솔직히 말하면 남성이 배우자의 정절을 중요시했다. 신혼 첫날밤 신부의 몸에서 순결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색깔’이 보여야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던 것이 10~20년 전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즉각 “‘쿨’한 자리에 웬 ‘노땅’?”이라는 눈짓이 돌아온다. 술이 거나해진 여성이 있다면 ‘술병 그립’ 자세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고? 요즘 남성은 더 이상 순결을 확인하려 들지 않고, 여성 역시 결혼을 전제로 한 성관계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도, 아이도 싫어. 섹스는 OK!”가 대세가 된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의 성 개방과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로 인한 여권 신장의 영향인 것으로 보이지만, 민주화 이후 사회 분위기가 더욱 다양해지고 자유로워진 측면이 더 크다. 여기에 정신분석학이라는 현미경을 들이대면 혼빙간죄 위헌결정에는 수많은 나선형 구조의 DNA가 숨어 있다.
첫째, 혼빙간죄 위헌결정은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이 ‘현실 원칙(reality prin -ciple)’을 이긴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두 가지 기능을 갖는다. 하나는 쾌락 원칙으로,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면서 동시에 긴장을 방출하고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현실적 판단과 학습을 통해 쾌락 원칙을 적절히 조절하는 현실 원칙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원칙을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살아간다. ‘꿀벅지’ ‘S라인’ ‘초콜릿 복근’을 눈앞에 두고 당장 섹스를 시도하지 않는 이유도 이것이다. 상대의 반응이 의심스러운 데다, 비록 섹스 상대는 될지언정 결혼 상대가 아니라는 현실 원칙도 갖고 있는 것이다. ‘섹스=결혼’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다면 이러한 현실 원칙의 적용이 가능하다. 혼빙간죄에 의해 처벌받는다는 현실 원칙이 있어도 신경이 쓰인다.
남녀가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 먼저 따지는 것은 법이나 처벌이 아니라, 사람들(부모, 애인이나 배우자 등)과의 관계다. 사람들은 이제 결혼 여부보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나갈지를 먼저 고민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실 원칙이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는 마음껏 쾌락 원칙을 따를 수 있게 된다. 앞으로 간통죄마저 폐지된다면 쾌락 원칙은 날개를 달 수 있다.
둘째, 고립(isolation)보다 친밀(intimacy)을 선택하라는 암묵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교육심리학자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단계 중 20~40세는 친밀이냐, 고립이냐의 대비가 이뤄지는 시기라고 했다. 친밀감을 잘 형성하는 사람이 건강한 발달을 이룬다. 성인은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서로 협동해서 일하는 가운데 친밀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해 고립상태에 놓인다. 이성 간 교제와 결혼이 이뤄지는 시기도 바로 이때다. ‘성관계=결혼’ 개념으로만 본다면 고립상태에 빠진 사람이 늘게 될 것이다.
젊은 여성이 한 번의 섹스를 통해 결혼하면 친밀감 형성에 성공하고, 실패하면 고립상태에 빠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섹스 자체가 이성과의 친밀감을 확인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여성은 결코 고립상태에 놓이지 않는다.
셋째, 자율성(autonomy)이 의존성(dependence)보다 강조되고 있다. 어떤 여성이 필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함께 자자고 하면 거절하는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아무리 매너 좋고 멋진 남자라도 같이 자고 나면 흥미가 싹 가셔요. ‘당신도 똑같은 남자구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인간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행동할지, 아니면 누군가(개인이든 조직이든)에게 의존할지에 대한 갈등이 숨어 있다. 상대방과 섹스를 해서 결혼하면 그것이 곧 상대방의 의존 욕구를 충족시켜주던 때가 있었다. 상대방은 여성이었고, 의존 욕구의 내용은 ‘남편에게 의존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살림하고 내조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이런 의존 욕구를 충족시켜줄 남성이 점점 줄고 있다. 여성 또한 기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상대방과 결혼하든, 안 하든 감정과 판단에 충실해 섹스를 한다면 이는 자신의 자율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이제 남성이고, 자율성의 내용은 ‘이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거나 끌려서 내가 성적으로 응답 또는 제안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성적인 유혹과 제안이 여성에게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결혼은 전제조건이 되지 않는다.
‘희대의 카사노바’ 재평가 받나
넷째, 특수성(specialty)보다 보편성(universality)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과거의 보편성은 처녀가 순결을 지키다가 남성을 만나 성관계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여성의 결혼과 출산 연령이 계속 높아져 정부가 저출산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20대 후반과 30대 여성들이 과연 순결을 유지하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얼마 전 필자와 상담한 30대 전문직 미혼여성은 최근 남자친구가 자신을 성적으로 소홀히 대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사회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행동양식이 달라지면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변하면서 결국 법이 바뀌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성, 결혼에 대한 관념과 행동이 얼마나 바뀔지 예측하긴 쉽지 않다. 관념이 바뀌어 행동이 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행동이 달라져 관념이 바뀌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자.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관념과 행동은 변화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희대의 카사노바’ 박인수 씨도 요즘 같으면 재평가를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걱정은 결혼의 의미가 지금보다 퇴색해 “결혼보다는 섹스를!”을 외치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필자 또한 대한민국 중년남성의 일원으로서 가정과 아이들이 계속 생겨나야 우리의 미래가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혼의 중요성에 대해 물어보면 남성과 여성의 대답엔 차이가 있다. 과거엔 여성의 인생에서 결혼은 매우 중요한 목표이자 출발점이었다. 반면 남성이 청첩장을 돌리면 결혼 선배들은 어깨를 툭툭 치며 “결혼은 무덤이야”라고 엄숙하게 귓속말을 하지만, 대부분 가볍게 여겼다.
‘정절’ 강조하면 ‘노땅’ 취급
2009년 11월26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혼인빙자간음죄(이하 혼빙간죄)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혼빙간죄란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하는 죄’를 말한다. 헌법재판소는 위헌결정의 근거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국가 스스로 부인하고 남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들었다. 여기에 “오늘날 보호의 실효성이 현격히 저하된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들만의 ‘성행위 동기의 착오의 보호’로서 그것이 침해되는 기본권보다 중대하다고는 볼 수 없다”는 정말 어려운 복문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과거 여성은 정조 관념을 중요하게 여겼다. 아니, 여성보다 사회, 더 솔직히 말하면 남성이 배우자의 정절을 중요시했다. 신혼 첫날밤 신부의 몸에서 순결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색깔’이 보여야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던 것이 10~20년 전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즉각 “‘쿨’한 자리에 웬 ‘노땅’?”이라는 눈짓이 돌아온다. 술이 거나해진 여성이 있다면 ‘술병 그립’ 자세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고? 요즘 남성은 더 이상 순결을 확인하려 들지 않고, 여성 역시 결혼을 전제로 한 성관계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도, 아이도 싫어. 섹스는 OK!”가 대세가 된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의 성 개방과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로 인한 여권 신장의 영향인 것으로 보이지만, 민주화 이후 사회 분위기가 더욱 다양해지고 자유로워진 측면이 더 크다. 여기에 정신분석학이라는 현미경을 들이대면 혼빙간죄 위헌결정에는 수많은 나선형 구조의 DNA가 숨어 있다.
첫째, 혼빙간죄 위헌결정은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이 ‘현실 원칙(reality prin -ciple)’을 이긴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두 가지 기능을 갖는다. 하나는 쾌락 원칙으로,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면서 동시에 긴장을 방출하고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현실적 판단과 학습을 통해 쾌락 원칙을 적절히 조절하는 현실 원칙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원칙을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살아간다. ‘꿀벅지’ ‘S라인’ ‘초콜릿 복근’을 눈앞에 두고 당장 섹스를 시도하지 않는 이유도 이것이다. 상대의 반응이 의심스러운 데다, 비록 섹스 상대는 될지언정 결혼 상대가 아니라는 현실 원칙도 갖고 있는 것이다. ‘섹스=결혼’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다면 이러한 현실 원칙의 적용이 가능하다. 혼빙간죄에 의해 처벌받는다는 현실 원칙이 있어도 신경이 쓰인다.
남녀가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 먼저 따지는 것은 법이나 처벌이 아니라, 사람들(부모, 애인이나 배우자 등)과의 관계다. 사람들은 이제 결혼 여부보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나갈지를 먼저 고민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실 원칙이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는 마음껏 쾌락 원칙을 따를 수 있게 된다. 앞으로 간통죄마저 폐지된다면 쾌락 원칙은 날개를 달 수 있다.
둘째, 고립(isolation)보다 친밀(intimacy)을 선택하라는 암묵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교육심리학자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단계 중 20~40세는 친밀이냐, 고립이냐의 대비가 이뤄지는 시기라고 했다. 친밀감을 잘 형성하는 사람이 건강한 발달을 이룬다. 성인은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서로 협동해서 일하는 가운데 친밀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해 고립상태에 놓인다. 이성 간 교제와 결혼이 이뤄지는 시기도 바로 이때다. ‘성관계=결혼’ 개념으로만 본다면 고립상태에 빠진 사람이 늘게 될 것이다.
젊은 여성이 한 번의 섹스를 통해 결혼하면 친밀감 형성에 성공하고, 실패하면 고립상태에 빠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섹스 자체가 이성과의 친밀감을 확인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여성은 결코 고립상태에 놓이지 않는다.
셋째, 자율성(autonomy)이 의존성(dependence)보다 강조되고 있다. 어떤 여성이 필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함께 자자고 하면 거절하는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아무리 매너 좋고 멋진 남자라도 같이 자고 나면 흥미가 싹 가셔요. ‘당신도 똑같은 남자구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인간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행동할지, 아니면 누군가(개인이든 조직이든)에게 의존할지에 대한 갈등이 숨어 있다. 상대방과 섹스를 해서 결혼하면 그것이 곧 상대방의 의존 욕구를 충족시켜주던 때가 있었다. 상대방은 여성이었고, 의존 욕구의 내용은 ‘남편에게 의존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살림하고 내조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이런 의존 욕구를 충족시켜줄 남성이 점점 줄고 있다. 여성 또한 기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상대방과 결혼하든, 안 하든 감정과 판단에 충실해 섹스를 한다면 이는 자신의 자율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이제 남성이고, 자율성의 내용은 ‘이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거나 끌려서 내가 성적으로 응답 또는 제안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성적인 유혹과 제안이 여성에게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결혼은 전제조건이 되지 않는다.
‘희대의 카사노바’ 재평가 받나
넷째, 특수성(specialty)보다 보편성(universality)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과거의 보편성은 처녀가 순결을 지키다가 남성을 만나 성관계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여성의 결혼과 출산 연령이 계속 높아져 정부가 저출산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20대 후반과 30대 여성들이 과연 순결을 유지하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얼마 전 필자와 상담한 30대 전문직 미혼여성은 최근 남자친구가 자신을 성적으로 소홀히 대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사회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행동양식이 달라지면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변하면서 결국 법이 바뀌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성, 결혼에 대한 관념과 행동이 얼마나 바뀔지 예측하긴 쉽지 않다. 관념이 바뀌어 행동이 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행동이 달라져 관념이 바뀌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자.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관념과 행동은 변화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희대의 카사노바’ 박인수 씨도 요즘 같으면 재평가를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걱정은 결혼의 의미가 지금보다 퇴색해 “결혼보다는 섹스를!”을 외치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필자 또한 대한민국 중년남성의 일원으로서 가정과 아이들이 계속 생겨나야 우리의 미래가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