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4일 ‘송영길 의원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손학규 전 대표와 권노갑 전 의원, 정세균 대표가 박수를 치고 있다(오른쪽부터).
손 전 대표는 지난 10·28 재·보궐 선거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았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후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던 이찬열 후보(수원 장안)를 거뜬히 당선시켰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50%에 육박하고, 정당 지지율에서도 한나라당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이던 상황에서 일군 승리였다.
자신의 인기 때문에 다른 후보를 당선시킬 수 있는 힘을 ‘코트테일 이펙트(coattail effect)’라고 한다. 지난 4·29 재·보궐 선거 당시 경주에 출마한 정수성 후보가 박근혜 전 대표의 힘 때문에 당선되고, 같은 날 실시된 전주 선거에서 신건 후보가 정동영 전 장관의 대중성 덕에 승리한 경우가 전형적인 예다.
‘코트테일 이펙트’와 풍감(風鑑)
코트테일 이펙트에 관한 한 누가 뭐래도 박근혜 전 대표가 최고다. 오죽하면 자신의 성(姓)을 당명으로 따온 정당까지 만들어졌을까. 그러나 2009년 재·보궐 선거에서의 코트테일 이펙트만큼은 그 순도 면에서 손 전 대표가 박 전 대표나 정 전 장관보다 강했다. 박 전 대표나 정 전 장관이 각각 자신의 텃밭에서 일군 승리라면, 손 전 대표는 수도권에서 만들어낸 승리이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이나 총선에서 수도권은 민주당이 약세를 보인 지역이다. 이런 지역에서, 그것도 어떤 현직도 갖지 않는 상태에서 얻어낸 승리의 가치가 더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손 전 대표의 최근 행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김헌태 전 소장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것이다. 둘 사이의 개인적 인연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이런 소문은 있었다. 손 전 대표가 민주당 대표로 있을 때 김 전 소장에게 통상 의원급이 맡는 고위당직을 제의했다는 것.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왜 아는 사람은 알지만 일반인에게는 거의 생소한 인물에게 손 전 지사가 공을 들이는 것일까.
‘풍감(風鑑)’이란 말이 있다. 용모와 풍채로 사람의 성질을 판단하는 것이다. 빗대면, 특정인의 장점이나 정체성으로 사람 간의 인연을 파악하는 것도 풍감이리라. 김 전 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여론조사 전문가다. 김 전 소장이 최근에 낸 책의 제목이 ‘분노한 대중의 사회’다. 이 책에서 김 전 소장은 “참여정부가 실패한 이유는 젖 달라고 우는데 책 읽어줬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여론조사 전문가를 아끼는 데는 ‘동병상련’인 까닭도 있겠지만, 손 전 대표가 그만큼 민심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느 정치인인들 여론을 무시할까마는 손 전 대표가 여론의 흐름에 유별나게 집착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전력 때문이다. 한나라당 후보 경쟁에서 3위에 밀려 있던 처지에서 탈당한 것이기에, 10년 넘게 몸담았던 당에서 나온 것이기에 손 전 대표로서는 태생적 한계를 갖는다. 그래서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손 전 대표의 탈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떻든 가치를 함께하면 당을 함께하는 것이고 가치를 다르게 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당에 입당하고 어느 정당에서 탈당하는 것은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엔 규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탈당을 하든 입당을 하든 평상시의 소신을 갖고 해야지, 선거를 앞두고 경선에서 불리하다고 탈당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후보가 되기 위해 당을 쪼개고 만들고 탈당하고 입당하고… 이런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을 근본에서 흔드는 것이다.”
참 아픈 지적이다. 이런 한계 때문에 그는 여론의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10·28 재·보궐 선거에서 ‘올인’해 이뤄낸 수원 장안에서의 승리가 그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법하다. ‘면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탈당의 기억이 희석되고 있다는 ‘여론 반전’의 시그널로 읽을 여지가 충분하다. 때문에 이 승리가 손 전 대표의 정치인생에 중대한 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지방선거 이전까지 복귀하지 않을 듯
손 전 대표의 조용한 부상은 장기간의 칩거행보 덕분인 측면도 있다. 그의 칩거는 그전의 ‘진지한’ 민생투어와 더불어 자신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계기, 일종의 여론호소였다. 칩거행위 자체가 갖는 메시지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른 정치인의 행태와 차별된다는 점이다. 4월 재·보궐 선거에서 조급하게, 그것도 탈당까지 무릅쓰고 현실정치에 복귀한 정동영 의원이나 이런저런 꾀를 내며 안달복달하는 이재오 전 의원과 다른 모습을 손 전 대표는 보여줬다. 상당히 돋보이는 행보다.
또 하나, 야권의 후보 구도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는 점도 새삼 손 전 대표에게 눈길을 돌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득표 잠재력만 놓고 볼 때, 수도권에서 나름대로 기반을 가지고 있는 데다 중도성향의 표를 결집할 가능성이 있는 손 전 대표가 야권 후보 중에서 가장 앞선다. 정동영 의원은 전북 내지, 더 크게 봐도 호남에 고착돼 있다. 유시민 전 장관은 지지율 여부를 떠나 대선 후보 클래스(class)로서는 아직 손색이 있다. 정세균 당 대표는 지지율이 낮아도 너무 낮다. 따라서 노무현-이명박과 같은 폭넓은 후보 정체성(candidate identity)을 확보할 가능성에서 손 전 대표가 유리해 보인다.
손 전 대표가 지방선거 이전에 정치일선에 복귀하지 않는 것은 좋은 선택이다. 소신이든 계산이든 정치일선에 복귀하는 것보다 분명 실익이 크다. 만일 그가 세종시 논란에 끼게 되면 수도권 지지기반을 가진 그로서는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가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빠져 있는 것이 편하다. 손 전 대표도 이런 점을 고려해 지난 10·28 재·보궐에 출마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가장 어려운 과제는 친노 세력과의 관계설정일 것이다. 이미 노 전 대통령이 그에게 붉은 딱지를 붙여놓은 이상, 친노 세력이 손 전 대표와 자연스럽게 손잡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 친노 세력이 손 전 대표를 거부하고, 대거 국민참여당으로 옮겨가는 상황도 예상해볼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제로섬의 관계에 있는 정동영 의원과 한판 승부도 벌여야 할 것이다.
부활의 계기는 잡았지만, 앞으로의 싸움이 결코 만만치 않다. 시인 동방규가 “봄이로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고 한 까닭은 꽃이 피지 않았기(無花草) 때문이다. 손 전 대표에게도 아직 ‘꽃’이 없다. 그렇다면 손 전 대표의 지금 처지가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