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에서는 통신사의 값비싼 데이터통신망을 통하지 않고도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무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예약하면 언제 개통할 수 있죠?”
“저희 매장만 해도 벌써 주문이 4000대가 밀렸습니다. 언제 받으실 수 있을지 확답을 드리진 못하겠네요.”
일단 예약을 해두라며 신청서를 건넨다. 배송이 지연돼 고객들의 불만이 크지 않느냐고 묻자 “아이폰 구매자들은 제품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 큰 불만은 없다”고 했다. 사전가입 예약자만 6만5000여 명에 이를 만큼 ‘아이폰 신드롬’은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항 중이다.
“불만 때문에 아이폰 구매”
“아이폰은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많습니다. 그래도 아이폰을 사려 하는 이유는 이참에 소비자를 우습게 여기는 대형 통신사와 제조사의 태도에 경종을 울리고 싶어서입니다.”
‘프리스비’ 매장에서 만난 김민지(20) 씨는 기존 이동통신사 및 휴대전화 제조사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한국 통신시장의 실상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간 SKT, KT, LGT 등 이동통신 3개사는 ‘갑’의 위치에서 이동통신 시장을 5:3:2로 분할해 고만고만한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통신회사가 ‘갑’이라면 단말기 제조사가 ‘을’이 되겠지만, 제조사인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글로벌 대기업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통신사와 한통속으로 독점력을 발휘해왔다.
이런 폐쇄적 구조 속에서 소비자들은 불공정한 서비스를 선택의 여지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값비싼 통화요금, 정보이용료보다 비싼 데이터 요금, 해외 판매가보다 비싼 출고가, 보잘것없는 스마트폰 제품군 등에 대한 불만은 자연스럽게 아이폰에 대한 기대감으로 표출됐다.
아이폰은 스마트폰의 일종이다. 스마트폰은 PC와 같은 운영체제를 탑재해 인터넷은 물론, 사용자가 필요한 소프트웨어(SW)를 마음대로 설치해 사용할 수 있는 휴대전화다. 이 때문에 ‘손 안의 PC’라고도 불린다. 이동통신시장 점유율 50.5%로 부동의 1위를 자랑하는 SKT는 아이폰 도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이폰이 데이터 요금과 통신요금이라는 독점적 수익을 정면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 이동통신사들은 국내 휴대전화에서 와이파이(Wi-Fi), 즉 무선 네트워크 기능을 빼는 대신, 모든 단말기에 위피(WIPI)라는 동일한 무선 인터넷 플랫폼을 적용해왔다. 해외 단말기들조차 반드시 위피를 탑재해야만 국내에서 판매가 가능했다. 그 결과 국내 통신사들은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돈을 벌었다. 사용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무선 인터넷 접속을 위해 네이트(NATE)나 쇼(SHOW), 오즈(OZ) 같은 값비싼 데이터통신망을 이용해야 했다.
이로 인해 사용자들은 휴대전화 구입과 동시에 무선 인터넷 사용제한을 가장 먼저 설정할 정도로 데이터통신 사용을 기피했고, 한국은 점차 무선 인터넷 후진국이 돼갔다. 국내업체들은 위피만 개발하면 됐기에 심비안, MS, OSX 등 국제적으로 폭넓게 통용되는 플랫폼 개발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4월 위피 탑재 의무화 정책은 폐지됐다.
폐쇄적 무선통신 시장 빗장 열려
아이폰을 이용하면 더는 값비싼 데이터 통신을 경유하지 않아도 된다. 와이파이가 부착돼 있어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용량 제한 없이 무료 사용이 가능하다. ‘음성통화 중심에서 데이터 중심으로 급격히 변모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소프트웨어를 다운받는 앱스토어에서 인터넷전화 skype를 다운받으면 무선 인터넷이 제공되는 곳 어디서든 통신사를 통하지 않고 인터넷전화가 가능하다. skype끼리는 무료통화, skype와 일반전화는 기존 휴대전화 요금의 절반 가격이다.
아이폰 출시에 힘입어 제조사인 애플은 명실상부한 ‘갑’의 위치로 올라섰다. 내년에는 구글 운영체제를 탑재한 안드로이드폰 등 와이파이가 장착된 각종 스마트폰이 국내에 잇따라 출시된다. 따라서 통신사의 힘은 줄고, 제조사의 힘은 커질 전망이다. 통신사들의 고착화하던 시장점유율 순위에도 변동이 예상된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성호 수석연구원은 “특정 플랫폼을 탑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향후 제조사가 통신사에서 독립된 구조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스마트폰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스마트폰 내 애플리케이션을 사고파는 애플리케이션 산업과 함께 모바일 광고시장의 동반성장이 예상된다. 한 광고업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기업은 온라인 광고에 중점을 둬왔다. 스마트폰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모바일 광고도 기업들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미 KT는 오버추어코리아 등과 손잡고 개인형 모바일 광고 서비스를 도입할 예정이다. 이용자들이 보낸 문자 메시지에 포함된 단어, 사용자 위치 등을 연계해 다양한 방식으로 모바일 광고시장을 열어보겠다는 것. 개인 맞춤형 광고가 도입되면 기존의 대형 광고주 이외에도 소규모 상점으로까지 광고주 저변이 확대될 전망이다.
“아니, 구입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가격이 30만원이나 떨어졌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걸 그랬어요. 소비자가 봉인 줄 아나봐요.”
한 달 전, 삼성전자 T옴니아2(8GB)를 50여 만원에 구입한 김모(50) 씨는 불과 한 달 만에 휴대전화 가격이 30만원이나 떨어지자 분통을 터뜨렸다. 삼성전자 T옴니아2(8GB) 판매가는 92만4000원. 아이폰 출시 시점에 맞춰 출고가가 88만원으로 인하됐다. 월 4만5000원을 내는 SK텔레콤의 ‘올인원 45’에 가입하면 24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 약정, 할부, 요금상품 등 가입조건에 따라 최대 68만원의 보조금을 제공받는다.
아이폰의 국내 출시를 계기로 스마트폰들 사이에 진검승부가 벌어질 전망이다. 삼성 옴니아, HTC 터치듀얼, 노키아 N900, RIM 블랙베리 볼드(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와 국내 최대 통신사 SKT가 겨우 아이폰 하나 때문에 갑작스럽게 가격을 내리면 이전에 가입한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김씨는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를 모아 소비자보호원에 집단민원을 제기할 작정이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는 개통 철회와 환불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고가정책을 고집하던 SKT와 삼성전자가 기존 구매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출시 한 달여 만에 가격인하를 단행한 것은 아이폰의 공세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폰의 출고가는 81만4000원이지만, 월 4만5000원짜리 ‘i-라이트’에 가입하면 신형 애플 아이폰을 26만4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기본료 9만5000원 요금제에 가입하면 공짜로도 살 수 있다.
아이폰의 등장은 스마트폰의 가격 거품이 꺼지는 촉매제로 작용할 전망이다. 소비자시민모임 윤명 조사연구부장은 “당분간은 스마트폰 가격 하락이 지속돼 소비자들이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별도의 요금제에 가입해야 하는 등 ‘숨은 가격’이 있는 만큼, 진정 소비자가 낮은 가격으로 구입하는지는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들 간의 경쟁으로 소비자의 편의는 그만큼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IT전문 블로거 김학균 씨는 “아이폰 출시로 소비자는 더 좋은 조건에서 스마트폰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아이폰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과 환상이 걷히고, 스마트폰들 간에 진정한 경쟁이 벌어진다면 그 이득은 소비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람들은 ‘성능 좋은 하나의 제품’ 그 이상을 원합니다. 들고 있든, 입고 있든, 만지고 있든 그 제품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표현해주기 바랍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스펙상의 한두 가지 약점이나 불편함은 눈감아줄 수도 있을 겁니다.”
문화코드엔 불황이 없다
유니타스클래스 방경환 마케터는 “아이폰은 하나의 상품이 아닌 브랜드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폰 신드롬에는 우수한 기능도 한몫을 했겠지만, 스펙으로만 따지면 아이폰은 ‘최고’라고 하긴 어렵다(상자기사 참조). 하지만 아이폰은 스마트폰의 정형을 제시하며 시장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했다. 경기불황 속에도 아이폰만은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실정이다. 상품이 아니라 ‘문화’를 팔았다는 게 그 원동력이 됐다.
일찍이 아이폰 열풍이 불었던 미국에서 아이폰은 일상에 깊숙이 녹아든 하나의 문화가 돼버렸다. 아이폰이 없는 미국인은 결코 상상할 수 없게 됐다. 마치 우리가 김치를 먹지 않는 한국인을 상상할 수 없듯.
한국에서도 아이폰이 문화코드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학균 씨는 “사람들이 아이폰을 사기 위해 9시간씩 기다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아이폰에 열광하는 아이폰 신드롬 자체가 이미 하나의 문화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아이폰이 태풍의 눈이 될지,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지 전문가들의 전망은 엇갈린다. 국내 통신사들은 통화 음질을 중시하는 한국 사용자들의 특성상 아이폰이 초기에 반짝하다 말 것이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내놓기도 한다. 또한 아이폰만의 강점인 터치감과 편리한 UI 및 앱스토어도 몇 년 후면 모든 기기에 구현되는 보편적인 기술이 될 것이다.
‘한번 쏘아버린 화살’은 되돌릴 수 없다. 아이폰의 출현으로 대중의 문화코드에 부합하려는 통신사와 제조사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통신시장이 ‘아이폰 이전’과 ‘아이폰 이후’로 재편되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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