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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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을 읽는 첫 번째 코드 ‘史記’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10-04 1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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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을 읽는 첫 번째 코드 ‘史記’

    ‘사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EBS 기획시리즈 ‘김영수의 사기와 21세기’.

    루쉰이 “산문에는 굴원의 ‘이소’, 역사서의 절창은 ‘사기’(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라고 했던 말마따나, 사마천(B.C. 145~B.C. 86)의 ‘사기(史記)’는 ‘동양을 읽는 첫 번째 코드’다. 미국 프린스턴대학 니콜라 디코스모 교수는 ‘오랑캐의 탄생’(황금가지)에서 중국을 탄생시킨 것은 진시황제가 아니라 역사가 사마천이라고까지 했다. 서양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통해 야만인들과 구분되는 그리스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했다면,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중국(중심)-오랑캐(주변)’를 규정하는 화이사관(華夷史觀)을 처음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사기’는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공자가 엮은 ‘춘추’ 같은 ‘사기 전(前)’의 역사서는 왕과 연대기를 중심으로 한 편년체였다. 하지만 ‘사기’는 본기(本紀·천자에 대한 기록)의 기(紀)와 열전(列傳·보통사람 이야기)의 전(傳)을 합한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술서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위로부터의 역사(본기)’뿐 아니라 ‘아래부터의 역사(열전)’까지 아우른 작품이다. 강소성, 호남성, 산동성, 사천성, 운남성 등을 직접 답사하고 기록한 사마천이 사관의 기록이나 왕실문헌, 제가백가의 경서에만 의존하던 기존 역사서술 풍토의 틀을 깬 것이다.

    또한 ‘사기’는 인간승리의 결정판이다. 천문·역술·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태사령(사마씨의 가업)이었던 사마천은 기원전 99년경 ‘이릉의 화(禍)’를 당한다. 흉노 토벌군이었던 이릉은 기병 5000명으로 적진에서 고립된 채 흉노 8만명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투항한다. 사마천은 ‘본심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훗날을 위해 투항한 것이라고 변호한다.

    이는 한 무제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나 진배없었다. 당시 한무제는 총애하는 이부인의 오빠이자 총대장인 이광리가 흉노 토벌에서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예부대를 이끌던 이릉마저 투항하자, 자신의 사심이 들통날까봐 심적 갈등을 겪던 차였다. 사마천은 반역죄로 요참(腰斬·허리를 베어 죽임) 판결을 받았다. 50만 전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든가, 궁형(宮刑)을 받든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급관리가 억만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사대부 남자로서의 최고 능욕인 궁형을 자청한다. 왜 그랬을까. 그의 변호다.

    “노비조차도 욕되면 능히 자결할 수 있는데 하물며 내가 못할 리 있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은인자중하며 구차하게 똥통에 떨어지길 불사한 까닭은 마음속에 미진한 바가 있는 것을 한(恨)으로 여겼고, 글이 후세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목숨을 부지한 사마천은 2년 뒤 중서령(비서실장)에 기용돼 한 무제에게 총애를 받지만, 수치감에 몇 번의 자살을 시도한다. 그리고 잔인한 운명을 이기고자 ‘발분’해 중국 최고의 명저 ‘사기’를 완성한다. 기원전 27세기의 신화시대에서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의 통사를 52만자(135권) 넘게 써낸, 불굴의 의지였다.

    저술 의도가 과연 얼마나 대단했기에 ‘사기’를 완간할 수 있었을까. 가업을 이으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못하면 불효라는 천추의 한을 안게 될까봐 그랬을까. 아니면 부와 권력, 남자로서의 행복을 얻지 못했으니 글로써라도 후세에 명성을 떨쳐 입신하려고 그랬을까. 불후의 명작 ‘사기’의 저술 의도치곤 너무나 속된 듯하다.

    사마천의 저술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실마리들이 있다. ①본기에서 패배자인 항우를 한 고조 유방보다 먼저 둔다. ②제후들을 다룬 세가(世家)에 공자와 진섭(진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농민봉기군 수장)을 넣고, 소상국세가(소하)와 유후세가(장량)는 있지만 같은 한나라 개국공신인 한신, 경포, 팽월은 열전으로 강등했다. ③자신을 궁형에 처한 황제 유철(한 무제)을 황로사상의 섭생술이나 미신에 미친 용렬한 인간으로 그렸지만, 한제국의 번성을 기원했다. ④지방자치가 아니라 중앙집권 통일제국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열전에서 한비(법가)를 노자(도가)와 한데 엮어 낮게 평가하고, 유학을 한나라의 국가통치 이데올로기로 만든 라이벌 동중서를 비판하면서도 공자(유가)를 높이 평가했다. ⑤‘사기의 백미’ 열전에 백이숙제를 가장 먼저 두었다. ⑥‘70열전’에서 환관이나 외척, 저잣거리 광대, 혹리, 자객, 유협, 부자 등 정사와는 거리가 먼 야사인물들을 다뤘다.

    후한 시대의 반고는 ‘한서’의 사마천전 보임안서(報任安書·사마천이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기’ 저술 의도는 “천과 인간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밝혀 스스로 독자적인 입론의 체계를 이루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⑤(백이숙제 열전)에 사마천의 궁극적인 의도가 담겨 있을 성싶다.

    “천도는 편애가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굶어죽었다. 공자는 일흔 명의 제자 중에서 안연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안연은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말기 시대 도척(盜?)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쳐 먹었다. 수천명의 무리를 모아 잔인한 짓을 하며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렸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일 천도가 참으로 존재한다면,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었겠는지 심히 의혹스러울 뿐이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天道)’라면 이는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마천전의 ‘시경’ ‘서경’ ‘중용’ ‘맹자’ 같은 경전이나 당시의 ‘동중서’(이후의 유학도) 등은 천도에 지적 능력이 있고, 착한 사람은 하늘이 복을 베푼다고 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백이숙제와 안연, 그리고 도척의 예를 통해 정말 그런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 사마천은 천도가 있다고 봤을까, 없다고 봤을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사마천은 천도는 있고 영원불멸하다고 봤다. 그래서 현실세계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모순을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역사서술)”를 통해 해명하고자 했다. 천도는 있고 영원불멸하기 때문에 백이숙제 같은 의로운 사람의 삶을 기록하면 현실의 불합리함을 역사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세도(世道)의 불합리함과 부조리를 역사로 기록해 천도를 역설적으로 구현하자는 생각이다.

    둘째, 사마천은 ‘천도가 없다’면서 지배자의 천명사상이나 동중서의 천인감응설(하늘과 인간은 교감함)을 비판했다. 역사를 인간의 활동으로 보기 때문에 천명은 아예 없거나, 설사 있더라도 그것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항우본기’에서 항우가 실패 원인을 자신의 잘못에 두지 않고 하늘을 원망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성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사기’(서울대출판부)에서 사마천은 역사를 필연성이나 숙명론으로 용인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의지와 감정이 배제된 것으로 보지 않고 “역사 자체를 개인의 능동적 활동의 집적”으로 봤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사기’는 “인간의 발견이자, 신화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의 역사”라고 평가한다. 김영수는 ‘역사의 등불, 피로 쓴 사기’(창해)에서 사마천은 역사를 인간의 사회활동으로 봤지, 신이 창조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마천은 과학정신에 입각해 의학을 다룬 편작창공열전으로 영혼불멸의 미신사상을 비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안을 놓고 논란이 인 적이 있다. 독일처럼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의롭지만 불행한 오늘날의 백이숙제나 안연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를 법이 걱정해준 셈인데, 사마천이라면 어떤 입장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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