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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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문 걸고 ‘외톨이’가 되었네

‘원룸’ 문화 시대 나홀로족 급속 확산… 두문불출 ‘은둔형’ 양산 부작용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4-09-30 1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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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과 문 걸고 ‘외톨이’가 되었네
    ‘원룸(one room)’. 사전적으로는 ‘방이 하나밖에 없는 집’을 가리키는 용어지만 요즘 사람들이 쓰는 ‘원룸’이란 말에는 보다 더 강한 사회적 암시가 숨어 있다. 한 방에 여러 명이 함께 사는 경우 ‘원룸에 산다’고 하지 않고, 방을 혼자 쓰더라도 집이 개방된 구조라 여러 사람이 쉬 드나들 수 있는 방은 원룸으로 불리지 않는다. 또한 고시원이나 하숙집과 같은 곳은 사람마다 각방을 쓴다 해도 원룸으로 불리지 않는다. 결국 원룸은 사회통념적으로 철저하게 사생활이 보장되는 조건 속에 ‘나홀로족’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핵가족화와 함께 1인 가구가 급격하게 늘면서 요즘 각종 사무실 밀집 지역과 대학 부근에는 원룸 건축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멀쩡한 하숙집과 다세대 주택들도 원룸 인기에 밀려 원룸 빌딩으로 리모델링을 하거나 아예 뜯어내고 다시 짓는 곳이 많은 것이다. 에어컨·침대·TV에 주차장까지 갖춘 풀 옵션 원룸으로 꾸며진 일부 고시원은 ‘원룸텔’로 불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고시생들이 밀집한 서울 신림동 등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요즘 고시원에서 실제 고시생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 시내에만 100여 개의 원룸텔이 생길 정도이고 보면 ‘원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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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룸의 인기는 통계청 자료에서도 재확인된다. 올 7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11월 현재 우리나라 총가구 중 15.5%에 해당하는 222만 가구가 1인 가구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 95년에 비해 35.4%가 증가한 수치다. 국내 총가구 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8%포인트 상승했다. 통계청은 2020년이면 100가구 중 22가구가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경제활동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가구가 전체 1인 가구의 44.3%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 결국 이들의 절반쯤은 누군가에게 기생해 생활을 하고 있거나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다.

    ‘이웃간 아는 척하지 않기’ 사생활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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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1인 가구, 즉 원룸 세대가 늘어가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원룸 문화도 형성됐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웃간에 아는 척하지 않기’. 이는 ‘원룸족’ 사이에선 ‘문화’가 아니라, 지키지 않으면 그 사회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는 ‘묵계’와 같은 것이다. 심지어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끼리도 원룸 건물 안이나 인근 도로에서 만나면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예절’이다. 물론 회사에 가서는 당연히 아는 척하지만 원룸에서는 아는 척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마포구의 한 원룸에 사는 이숙희씨(31·여)는 “사생활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원룸에 살 이유가 없다. 이런 룰을 모르는 원룸 초보자에게는 아는 척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직접 하기도 한다. 회사 동료나 거래처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지독한 ‘사생활 보호 원칙’으로 인해 때로는 우려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혼자 사는 노인이나 정신질환자가 사망한 경우 사체가 수개월 후에 발견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월세나 관리비가 장기 체납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집주인이 원룸의 사정을 챙길 일이 없는 까닭.

    이런 원룸의 은폐 문화는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수배자들에게 최상의 은신처를 보장해준다. 예전의 수배자들은 호텔이나 여관을 전전했지만 요즘은 월세형 원룸으로 몸을 피한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주민등록을 옮길 필요가 없고, 풀 옵션이 갖추어져 있는데다 월세만 내면 되기 때문에 원룸에 숨은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털어놓는다. 실제로 ‘최규선 게이트’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희완 전 서울시 부시장이나 최근의 새마을금고 20억원 대·인출사건의피의자 등 대형 사기사건의 피의자들은 모두 원룸으로 몸을 피했었다. 핸드폰 발신지 추적조사를 통해 들통이 나지 않았더라면 소재 확인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경찰의 뒷이야기다.

    이런 원룸의 ‘나홀로 문화’는 이미 상품화와 자본화의 단계에까지 와 있다. 최근 치과와 미용실, 은행들이 각 사업장 안에 원룸 치료실이나 원룸 미용실, 원룸 상담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비밀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원룸족의 특성을 반영한 것.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A치과는 60평 정도의 실내에 원룸 치료실만 7개를 만들어놓았으며 각 은행들도 PB(Personal Bank)를 만드느라 부산하다. 원룸 치료실을 찾은 원룸족 김희애씨(26)는 “치료할 때 다른 사람이 있으면 어수선하고 마음도 불안해져 진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젠 서울 강남에선 개업한 치과의원치고 원룸을 갖추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그뿐 아니다. 이미 10년 전 시장 지배력을 잃어버리고 생산이 중지됐던 소형 텔레비전과 소형 전기밥솥 등이 다시 출시되기 시작했다. 각 전자제품 메이커들은 이제 더욱 작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경쟁에 돌입한 실정. 15인치 완전평면 TV, 90ℓ짜리 냉장고, 3평형대 이동식 에어컨, 3kg대 소형 세탁기, 2인용 전기밥솥 등 나홀로족을 겨냥한 가전제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나홀로족들이 식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야채를 씻고 다듬어서 조리 직전의 상태로 배달해주는 업체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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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원룸이 현실세계에서의 도피 공간으로 전락한 경우 문제는 커진다. 바깥세계와는 단절된 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하루 종일 방구석에만 붙어 있는 소위 ‘방콕족’이 늘어나면서 때로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지난해 3월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서 발생한 원룸 화재로 숨진 서모씨(35)가 그런 경우.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불길을 잡고, 잔불 정리를 할 때까지 소방관들은 원룸 안에 사람이 있는 줄을 전혀 몰랐다. 이웃 주민들까지 그 집을 빈집으로 알았기 때문. 한밤중에 잠깐 먹을 것을 사러 나갈 때 외에는 TV와 인터넷에만 매달려 살았던 까닭에 이웃 주민들이 그의 존재를 의식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서씨 가족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IMF 때 실직한 후 ‘혼자 살고 싶다’며 집을 나가 원룸에 입주한 후 취직도 하지 않은 채 두문불출했다는 것. 10년간 직장생활로 벌어놓은 돈도 꽤 남아 있었지만 그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라면이나 간단한 음식을 혼자 해 먹는 데 필요한 지출이나 활동 이외에는 어떠한 사회적 활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유령 인간’이자 철저한 ‘은둔형 외톨이’였던 것이다.

    지난 2000년 가을, 일본에서는 이런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다룬 ‘콘센트’라는 소설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인터넷 작가 다구치 란디가 쓴 이 소설은, 포식의 시대인 현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세상에 나오기를 거부한 채 원룸에서 굶어 죽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치 사는 것을 그대로 멈춰버린 것처럼 방안에서 꼼짝도 않은 채 쇠약사한 남자와 그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밝혀나가는 이 소설은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하던 ‘히키코모리(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끊은 채 방안에 틀어박혀 세월을 보내는 상태) 현상’과 맞물려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히키코모리는 세계정신의학회에 보고됐고 ‘은둔형 외톨이’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에도 ‘은둔형 외톨이’라는 신인류가 출현했을까. 지난 8월28일 국내 정신과 전문의들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제12차 세계정신의학회에서 한국형 ‘은둔형 외톨이’의 출현을 공식 보고했다.

    세상과 문 걸고 ‘외톨이’가 되었네
    삼성생명공익재단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소장 이시형)와 강북삼성병원, 서울 동남정신과의원(원장 여인중)이 2000년 1월부터 2002년 5월까지 동남클리닉을 방문한 외래환자 총 240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중 31명이 친구가 한 명도 없고, 가족간의 대화가 없으며, 혼자 식사하는 ‘은둔형 외톨이’인 것으로 조사됐다.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는 ‘은둔형 외톨이는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이라며 ‘국내에서 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뒤바뀐 밤낮 ‘정신적 장애’ 증세

    연구팀이 밝힌 은둔형 외톨이의 특징은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인터넷과 TV에 몰두해 보내고 낮, 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고 있으며, 우울증·성격장애·강박증 등의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은둔형 외톨이로 진단된 9명의 경우는 부모를 폭행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앞으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게 연구팀의 지적.

    하지만 연구팀에 참여한 정신과 전문의 여인중 박사는 “은둔형 외톨이를 병자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냐는 경계가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 방에 박혀 두문불출한다고 해서 이를 병자로 보기는 힘들다”고 신중론을 폈다. 여박사는 “문제는 은둔형 외톨이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정신과를 찾지 않는 것”이라며 “풍부한 사례 분석이 이뤄져야 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정확한 병증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화관에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한테 쏠려 봤더니 내 팔이 스크린을 향해 뻗어 있고 내 손이 무언가를 열심히 누르고 있더군요. 휴대폰이었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에서 하던 버릇이 그대로 나온 거죠. TV에 보기 싫은 장면이 나오면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곤 하는데 스크린을 TV화면으로, 휴대폰을 리모컨으로 착각한 것이죠.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극심한 우울증 증상과 함께 외톨이 증세를 보이는 은모씨(30·여)는 최근 결국 정신과클리닉을 찾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1인 가구의 증가와 원룸의 번성이 은둔형 외톨이를 양산할 수밖에 없어 이런 은둔형 외톨이가 속출하고 있으나, 병리학적 분석을 위한 사회적 여건이 전혀 성숙돼 있지 않다는 사실. 정신의학자들은 은둔형 외톨이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기 전에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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