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판결할 때 ‘이기동 씨는 보이스피싱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진짜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총책 이기동’으로서 삶이 끝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2008년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의 대포통장 모집 총책 이기동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대포통장 수천 개를 중국 보이스피싱 총책들에게 넘겨 피싱범죄의 핵심 무기를 마련해준 혐의다. 하루 그의 손에 들어오는 대포통장이 적게는 400개, 많게는 600개에 달했다. ‘건달’ 시절 쌓은 인연을 바탕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대포통장 1개를 50만 원에 사 중국인 인출팀 총책에게 120만 원을 받고 넘겼다. 각종 부대비용을 빼고도 하루에만 족히 수천만 원 범죄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10대 시절 소년원을 거치는 등 방황하던 그는 폭력조직에 가담해 이미 한 차례 교도소 신세를 진 터였다. “어차피 징역 살 거 돈이라도 벌자”는 마음에 가담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기대했던 ‘폼 나는 삶’이 아닌, 또 한 번의 수감으로 마무리됐다.
피싱범죄, 불법사금융·주식리딩방과 결합해 다각화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 [박해윤 기자]
최근 피싱범죄 양상은 어떤가.
“예전에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어눌한 조선족 말투로 전화를 걸어와 돈을 편취했다면 이제는 스마트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피싱범죄가 기승이다. 팀워크가 정교한 피싱범죄 조직은 탈취한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피해자에 대해 다 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피싱범죄의 기본 수법은 크게 유혹과 협박 두 가지다. 감언이설로 홀리거나 각종 정황을 꾸며 피해자를 압박하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저신용자도 저리로 대출해주겠다’는 감언이설이나 관심을 끌 만한 이슈로 포장해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그 안에 있는 파일이나 링크를 잘못 열면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이 악성 앱(애플리케이션)에 감염된다. 이 경우 범인들이 실시간으로 피해자의 연락을 감시해 외부로 하는 전화를 당겨 받거나, 스마트폰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기능으로 피해자 위치를 실시간 파악하고 제멋대로 카메라를 작동시켜 촬영할 수도 있다.”
구체적 수법에 대해 설명해달라.
“평소 ‘해외 쇼핑몰 사이트에서 96만 원짜리 청소기가 결제됐다’는 식의 피싱 문자메시지를 받아봤을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문자메시지를 보낸 번호로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짚어보겠다. 전화를 걸면 해외 인터넷 쇼핑몰 직원이라는 사람이 받을 것이다. 청소기를 산 적 없다고 얘기하면 사기꾼이 먼저 ‘요즘 피싱범죄가 많아서 2차 피해가 우려되니, 우리 쪽에서 일단 결제는 취소하고 경찰서에 신고하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 몇 분 있으면 경찰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온다. ‘◯◯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인데, 쇼핑몰에서 청소기를 산 적도 없는데 결제됐다고 문자 받았죠?’라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다시 연락하겠다는 식으로 통화가 금세 끝난다. 잠시 후 경찰을 사칭한 사기꾼이 또 전화를 해오는데 이때부터 협박이 이어진다. 대개 이런 식이다. ‘지금 문제가 심각하다. 부산에서 보이스피싱(이외에도 마약 거래, 성매매 등 구실은 다양) 일당 64명을 검거했는데, 현장에서 당신 이름으로 된 통장 15개가 나왔다. 피싱범죄 조직이 은행 직원과 짜고 명의를 도용해 만든 건지, 당신이 범죄에 가담한 건지 수사해야 하니 협조하라’고 말이다.”
“범죄 현장에서 당신 명의 통장 나왔다” 으름장
최근 보이스피싱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는데도 이런 수법에 속는다는 말인가.“막상 당해보면 그럴싸한 정황을 연출하는 범죄 조직에 속기 쉽다. 수사당국 관계자를 사칭해 으름장을 놓으면 상당수 피해자는 겁먹기 마련이다. 그렇게 경찰을 사칭한 사기꾼이 시키는 대로 악성 앱을 스마트폰에 깔면 또다시 ‘당신 계좌의 돈이 범죄수익금인지 확인될 때까지 안전한 계좌로 옮기라’고 말한다. 은행 직원이 피싱범죄 조직과 한통속일 수 있으니 절대 사연을 얘기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말이다. 최근 은행 창구에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인출하면 직원이 그 목적을 물어 피싱 피해를 방지하다 보니 나온 수법이다. 이 대목에서 만약 피해자 계좌의 돈이 수천만 원 단위로 크면 송금이 번거롭기 때문에 피싱범죄 조직은 인출책 하선(下線)을 보내 피해자로 하여금 돈을 건네게끔 유도한다.”
2018년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통신사기피해환급법)이 제정되면서 보이스피싱의 공식 명칭은 ‘전기통신금융사기’가 됐다. ‘전기통신’을 다종다양하게 악용하는 ‘금융사기’로 피해자의 재산을 갈취하는 피싱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보이스(voice·목소리)나 문자메시지를 통한 스미싱은 물론, 사채나 주식리딩방 등 다양한 분야로 피싱범죄가 확대되고 있다는 게 이 소장의 분석이다. 심지어 피싱범죄로 의심될 경우 계좌가 막히는 점을 악용해 불특정 다수에게 돈을 송금하고 “계좌 정지를 풀려면 돈을 내라”고 협박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최근에는 피싱범죄가 의심될 경우 지급 정지도 빠르게 이뤄지는 편이다. 이로 인해 피싱범죄는 주식투자를 빙자하거나 인터넷 도박 형태를 띠는 등 다변화하고 있다. 가령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주식리딩방’이라며 피해자를 SNS 단체 대화방에 초대하는데, 거기서 피싱 일당이 ‘찍어준 종목을 샀더니 주가가 몇 배로 뛰었다’며 바람을 잡는다. 이렇게 피해자를 현혹해 다양한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도박 사이트를 개설해 돈을 좀 따게 해주고 나중에 가서 가지각색 핑계로 도박 머니의 현금 환전을 미루다 잠적하는 등 수법이 다양하다. 최근 살인적인 이자율과 악질적인 불법추심으로 큰 피해를 끼치는 불법사금융도 피싱범죄의 한 형태다.”
대포통장·폰 근절이 근본 대책
피싱범죄를 근절하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피싱범죄 유형을 모두 얘기하려면 이 자리에서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 한 유형을 막으면 또 다른 범죄 유형이 생기는데, 이런 식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핵심은 피싱범죄 일당이 그야말로 씩씩하게 피해자를 유도하는 광고를 뿌리고, 협박하고, 범죄수익을 거둬들일 수 있는 무기인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없애는 것이다. 범죄 조직이 매일 뿌리는 불법도박, 성매매, 소액대출, 심지어 마약광고 모두 타인 명의의 대포 계정으로 이뤄진다. 피싱범죄 피해자를 속이는 데 쓰이는 휴대전화가 대포폰인 것은 물론이다. 모든 범죄는 결국 수익이 목적인데, 그런 점에서 특히 대포통장이 핵심 무기다. 대포통장이 없으면 범죄수익을 현금화할 수 없다. 정부가 대포통장을 만드는 게 얼마나 큰 범죄인지 국민에게 충분히 알리고, 적발될 경우 초범이라도 실형을 구형하는 등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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