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캠프에 참여했던 한 인사의 설명이다. 튀는 걸 즐기지 않는 성격 때문에 밖으로 물러서 있긴 했지만 꾸준히 대통령과 교감해오던 인물이 위기를 맞아 공식라인으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김기춘 실장과 흡사하다는 것. 정통파 관료 출신으로 여러 명의 ‘주군’으로부터 끊임없이 신임을 받아왔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병기 대사의 국정원장 내정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구성이 마무리됐다는 사실. 안보정책의 총괄 조정 역할을 맡는 NSC 상임위는 이명박 정부 들어 폐지됐다가 1월 법률 개정을 통해 부활했다. 이후 NSC 상임위는 2월 남북 고위급 접촉과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3월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격, 4월 무인기 논란 당시 개최된 바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임위 구성원은 모두 7명. 국가안보실장이 위원장을 맡고, 외교부·통일부·국방부 장관과 국정원장, 국가안보실 1차장(NSC 사무처장 겸임), 외교안보수석이 참석자였다.
김관진 신임 국가안보실장(왼쪽)이 6월 2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가 시작되기 전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과 악수하고 있다.
이 중 6월 초 인사를 통해 자리가 바뀐 사람이 모두 세 명이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 내정자, 이병기 국정원장 내정자다. 아직 개각 인선이 진행 중이지만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유임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 2기 외교안보라인이 진용 정비를 끝낸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4월 이뤄진 대통령령 개정을 통해 NSC 상임위에 새로운 인물이 추가됐다는 사실. 바로 김기춘 실장이다. 세월호 참사 직전 이뤄진 이 조치에 대해 청와대는 “대통령이 의장인 NSC에서 상임위의 효율적 운영을 도모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며 “비서실장도 외교안보 분야 상황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과거에도 전례가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비서실장이 NSC 상임위의 정식 구성원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역대 청와대 외교안보라인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NSC 상임위가 본격적으로 운영된 것은 노무현 정부가 유일하지만,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필요한 경우에만 참석했을 뿐 법령에 의해 상임위원이 된 적은 없었다는 것. 이명박 정부에서는 NSC 상임위 대신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가 같은 기능을 수행했으나 역시 비서실장(당시 직함은 대통령실장)은 멤버가 아니었다.
2기 NSC 상임위원의 면면을 살펴보면 의구심은 한층 더 커진다. 전임 상임위원장이었던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박 대통령의 대선 공신. 국가안보실장이라는 자리 자체가 김 전 실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대통령과 오래 인연을 만들어온 김 전 실장조차 지난해에는 부실한 국가안보실 조직에 한계를 느꼈고, 올해 초 노무현 정부 NSC 수준으로 강화되면서 비로소 활로를 찾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반면 김관진 신임 국가안보실장의 경우 이명박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에 임명, 유임된 경우로 어느 모로 보나 ‘박근혜의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이번 정부 들어 장관직을 수행하며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지만 대선 한참 전부터 운명을 함께해온 이들과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 ‘외교안보 총괄 정책조정’이라는 임무에 걸맞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따져볼 대목이 있다는 뜻이다.
새로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한민구 내정자 역시 박 대통령과 인연이 두터운 편은 아니다. 더욱이 뚜렷한 소신이나 자기주장을 관철하기보다 위아래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중시하는 성격이라는 것이 함께 일했던 전직 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국방 현안과 관련해서도 안보정책 고유의 논리를 강조하는 대신 대통령 참모들의 ‘그림’에 어긋나지 않는 판단에 기울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김기춘 비서실장이나 이병기 국정원장 내정자의 오랜 국내 정치 경력에 눈길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20년 가까이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여당의 막후 핵심 역할을 맡아왔고,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왔다. 향후 NSC 상임위의 안보정책 논의과정에서 이들의 정무적 판단이 강도 높게 반영될 개연성을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 전직 안보부처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복잡다단한 국제정치 방정식
3월 11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김관진 실장은 임명 엿새 만인 6월 7일 서부전선 최전방 GOP(일반전초) 부대를 방문해 대비태세를 점검하며 “적 도발 시 가차 없이 응징해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는 강한 전투력을 갖추라”고 말했다. 한민구 내정자의 정식 임명 시점까지 국방부 장관직을 겸임한다고는 해도, 외교안보정책 전체를 책임지는 신임 안보실장의 첫 현장 활동으로 적절했는지를 두고 실무부처 당국자 사이에서는 뒷말이 나왔다. 국제 정치나 남북관계 등 ‘새로 담당하게 된 영역’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지 않았겠느냐는 논리다. 한 학계 전문가는 “자신의 임무를 이명박 정부 시절의 국가위기관리실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그 이틀 전인 6월 5일 일본 교도통신은 한국이 필리핀에 퇴역 예정인 포항급 초계함(1240t) 1척과 상륙정 1척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필리핀은 남중국해 도서 영유권 문제로 중국과 갈등하고 있는 상황으로, 지난해 일본은 중국 견제용 다목적 대응함(MRRV) 10척을 필리핀에 판매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 소식은 6월 8일 ‘월스트리트저널’을 통해 다시 한번 상세히 보도됐다. 저명한 중국 전문가의 말이다.
“일본 언론은 한중 사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 언론은 아시아 동맹국들이 ‘중국 포위’에 협력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기사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궁금한 건 초계함 무상 공여에 이렇듯 복잡다단한 국제 정치 방정식이 얽혀 있음을 우리 국방부가 충분히 고민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안보정책 결정의 미세조정이 필요한 대목이 바로 이런 부분이고, NSC 상임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큰 그림’을 보는 김관진 실장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