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이어받아온 김씨 일가 3대를 제외하면, 북한군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자리는 총정치국장이다. 총정치국장은 흔히 우리의 국방부 장관과 비슷한 인민무력부장, 합참의장과 비슷한 총참모장보다 권력이 센 북한 2인자로 꼽힌다. 총정치국은 인민군 안에 있는 조선노동당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인민군을 노동당이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혁명무력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당이 군을 이끌어야 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김씨 일가는 가장 신임하는 인물을 총정치국장으로 임명하곤 했다.

군관 350여 명과 부사관 50여 명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진 총정치국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혁명관(革命觀)과 대적관(對敵觀) 주입이다. 남조선으로 쳐내려가는 혁명을 해야 하는 이유와 남조선군을 무찔러야 하는 논리를 만들어 모든 부대에 전파하는 일이다. 이러한 통제 덕에 가혹한 식량난 등에도 인민군은 무너지지 않았다. 2010년 연평도 포격이나 5월 22일 우리 군 고속함을 향한 기습 포격에서처럼 전력이 열세라는 것을 알아도 명령이 떨어지면 주저하지 않고 공격을 감행한다.

인민군 총정치국과 같은 일을 하는 조직을 우리 군에서 꼽자면 바로 ‘정훈’이다. 그러나 한국군 정훈은 지리멸렬의 길을 걸어왔다. 우리 군은 정훈과 언론홍보를 담당하는 공보를 묶어놓았는데, 정훈 인맥은 심지어 공보에도 크게 밀리곤 한다.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이 자신의 거취에 영향을 끼치는 언론보도에 더 많은 신경을 쓴 탓이다.

‘김정일 표적지’ 중단 굴욕 사건

각 군 본부 정훈공보실 실장은 공보 분야에서 성장해온 장교가 맡는 것이 고착화한 지 오래다. 군에서 정훈은 각 부대 참모로 편성돼 있으므로 초급장교 시절 거쳐가는 자리 정도로 인식된다. 이렇듯 병과 이름은 ‘정훈’으로 남아 있지만 실제로는 ‘공보’를 주로 해온 정훈장교들이 ‘정훈 붕괴’를 좌시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현역 장교는 집단행동을 할 수 없다. 그 대신 나선 이들이 1000여 명의 예비역이다. 국방부 장관에게 “더는 정훈을 무력화하지 말라”는 요지의 서한을 보내고 면담을 요청하는 등 ‘정훈 바로세우기’에 나선 것이다. 도대체 정훈이 어떤 상태에 놓였기에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것일까.

정훈 출신 예비역들은 천안함-연평도 사건 후 있었던 김정일 표적지 사격훈련을 대표적인 정훈 붕괴 사례로 꼽는다. 당시 몇몇 현역과 예비군 부대에서 김정일 사진을 표적으로 걸어놓고 사격하는 훈련을 진행했다. 대적관을 강화하려면 적개심 고취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북한군이 크게 반발했다.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은 “남조선 도처의 훈련장들에 감히 우리의 ‘최고존엄’을 건드리는 표적까지 만들어놓고 총탄을 쏘아대는 천추에 용납 못 할 광기를 부리고 있다”며 “지금 이 시각부터 인민군 육·해·공군 및 노농적위군 부대들은 역적 무리를 일격에 쓸어버리기 위한 실제적이고 전면적인 군사적 보복행동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후 훈련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각급 부대는 김정일 표적지 사격훈련을 중단했다.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은 이 일을 대표적인 ‘정훈 굴욕’ 사건으로 꼽는다. 이들은 적개심 고취를 위한 대적관 교육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적으로부터 통제당한 것이 한국군 현실이라고 개탄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상황은 한층 심각하다. 당시 훈련은 정훈장교 주도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해당 부대를 이끄는 대대장이나 연대장의 판단에 따라 진행됐다. 대대나 연대의 정훈참모나 사령부, 본부에 있는 고위 정훈장교는 이 아이디어를 낸 적이 없었다. 정훈이 제구실을 못 하는 가운데 실질적으로 적과 싸워야 하는 일선 지휘관이 이 훈련을 기획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북한 측 반발로 중단됐으니 “우리 군의 정훈은 죽었다”는 탄식이 나온 것이다.

정훈은 1948년 국군 창설과 함께 설치된 병과다. 당시에는 정신전력의 중요성이 충분히 공감대를 얻었기에 국방부에 정훈(기획)국이 설치됐다. 6·25전쟁 시기에도 정훈은 삐라(전단)를 뿌리는 심리전을 펼치고 빨치산 토벌전에 참전하는 등 작전부대 구실을 톡톡히 수행했다. 군사정부 시절 심리전은 별도부대에 넘겼지만 정훈은 여전히 중요한 분야로 인식됐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화세력은 “군부독재를 정당화하고 이념교육을 한다”며 정훈을 비난했다.

이 때문에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정신교육의 중요성은 약화했지만, 조직은 축소되지 않았다. 정작 정훈이 된서리를 맞은 것은 보수정권이 들어선 후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정훈국 구실을 해온 정책기획관실을 교육정책관실로 재편하면서 정훈 업무를 정신전력과에서 담당하게 했다. 정신전력 임무를 국장이 아닌 과장 업무로 전락시킨 것이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이듬해인 2011년에는 현역 과장 자리를 줄인다며 이 자리를 예비역을 비롯한 민간인도 응모할 수 있는 계약직 보직으로 변경했다.

박근혜 정부는 더 나아갔다. 올해 초 정신전력과장을 4급 서기관직으로 한정해 공모한 것. 대령은 보통 3급으로 인정되므로 예비역 대령 출신 가운데는 응모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국방부에서 근무해온 40대 초반 문관(일반직)이 정신전력과장에 선발됐다. 이것이 정훈 출신 예비역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이다.

북한군은 일사분란한 체계

“준장이 맡는 육군 정훈공보실장은 물론, 대령이 임명되는 해·공군 정훈공보실장도 50대 중반이다. 정신전력과에 근무하게 된 중령들도 40대 중반이다. 그런데 정훈 경험이 없는 40대 초반 정신전력과장이 이들을 통제하게 했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국방부의 문민화가 비전문화와 전력 약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

북한군 총정치국은 정훈에 기무 기능을 더한 강력한 조직이다. 총정치국장에는 항상 최고 지도자의 최측근이 임명된다. 정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북한군은 명령이 떨어지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정훈 출신 예비역들을 대표해 국방부 장관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 이정호 육군 정훈동우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주한미군 장병들은 북한과 원수진 것이 없으니 병사 개인 차원에서는 인민군과 싸울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명령이 내려오면 바로 전투에 들어간다. 적개심이 없는데도 명령에 따라 적과 싸우려 나서는 것은 정신전력 교육을 제대로 받았기 때문이다. 미군은 정훈과 공보를 분리해놓고 있기 때문에 정훈이 공보에 밀리는 경우도 없다. 그러나 우리 군 정훈은 공보에 밀리는 데다 좌파로부터는 이념교육, 우파로부터는 개혁 대상으로 몰려 두들겨 맞아왔다. 이 때문에 우리 군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위기를 맞으면 갖고 있는 전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제는 우리를 지키고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정훈을 바로세워야 한다. 정훈을 죽이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북한군 총정치국을 꺾을 수 있는 정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국방개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