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권리’ 판결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룩셈부르크의 유럽사법재판소.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지만 한 번 인터넷으로 공유되기 시작했다면 지워지기는 불가능하다. 연예인 같은 공인은 과거 인터넷에 올린 글이나 사진으로 곤욕을 치르기 일쑤다. 평범한 사람조차 우연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면 누리꾼의 신상 털기가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이 본인과 관련한 데이터가 인터넷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어쩔 수 없었던’ 인터넷 환경이 대폭 바뀔 전망이다. 일명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 5월 13일(현지시간) 유럽사법재판소(ECJ)는 한 스페인 남성이 구글 링크를 통해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의 과거 정보를 삭제해줄 것을 구글 측에 요구한 소송에서 남성의 주장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구글이 이용자의 개인정보 침해 불만이 접수될 경우 당위성을 따져보고 필요하다면 해당 콘텐츠를 검색결과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 이 남성은 1998년 게재된 2건의 신문기사에 사회보장채무의 집행을 위한 압류 소송 관련 부동산 경매와 연계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됐다며 이에 대한 삭제를 해당 신문사와 구글에 요청했다. 해당 내용은 완전히 삭제됐지만 여전히 그런 정보가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개인정보 삭제 요청 쇄도
이미 스페인정보보호원은 구글 측에 해당 정보의 검색 노출 결과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날 유럽사법재판소도 남성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부적절하거나 연관성이 떨어지거나 과도한 개인정보에 대해 정보 당사자가 구글을 상대로 삭제를 요구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유럽 내 28개국에서만 유효하 지만, 파장은 전 세계적으로 미치고 있다. 인터넷상 정보에 대한 개인의 삭제 권리를 인정한 첫 판결이기 때문이다.
‘잊혀질 권리’라는 저서를 출간한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최근 국내 한 언론과의 e메일 인터뷰에서 “유럽사법재판소는 1995년 유럽연합(EU)이 ‘개인정보 보호 규정 및 지침’을 마련한 이후로 ‘잊혀질 권리’를 다듬는 작업을 20여 년 가까이 해왔다”며 “링크가 삭제되면 예전만큼 쉽게 정보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만 해도 개인이나 기관이 인터넷상 게시물 등으로 명예훼손 같은 피해를 보더라도 법원 판결 없이는 삭제가 불가능하게 규정돼 있다. 포털사이트 등이 임시로 해당 게시물을 차단하는 ‘블라인드(가려주기) 제도’를 운영하는 정도다. 영구 삭제를 위해서는 개인이 추가 입증을 해야 한다. 잊혀질 권리가 인정되면서 전 세계에서 이를 두고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판결이 있은 후 구글은 잊혀질 권리인 ‘개인정보 삭제 요청’을 받기 시작했다. 5월 29일 EU 주민을 대상으로 구글 검색페이지에서 시효가 지났거나 부적절한 개인정보 삭제를 요청하는 링크를 개설했다. 앞으로 유럽의 구글 사용자는 자기 이름 등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뉴스, 판결문, 다른 문서 등을 더는 검색 결과에 나타나지 않게 하거나 접근 경로를 지워달라고 구글 측에 요청할 수 있다. 외신에 따르면 구글이 삭제 요청을 받은 지 하루 만에 1만2000건의 신청이 쏟아졌다.
요청한다고 해서 반드시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유럽사법재판소가 판결한 사건에서도 거론된 개인정보는 16년이나 지난 ‘오래된’ 정보일 뿐이다. 게다가 유럽사법재판소가 정보 삭제를 명령한 곳은 구글과 구글 스페인이다. 검색엔진의 운영자로서 해당 기사의 검색 삭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부분일 뿐, 스페인 신문사가 게재한 기사 자체는 삭제 대상에서 배제됐다. 다시 말해, 잊혀질 권리가 모든 정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유럽 각국 정부도 움직이고 있다. 이 판결이 나온 후 독일 정부가 잊혀질 권리를 전담할 사이버 특별 법정 설치를 고려하고 있다는 ‘파이낸셜타임스’의 보도가 있었다. 독일 내무부 대변인은 “잊혀질 권리와 관련해 인터넷 기업과 개인 사용자의 분쟁을 해결할 권한을 갖는 특별사법기구인 ‘사이버 법정’이나 제3의 중재기구 설치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미성년자에 한해서만 잊혀질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이 지난해 9월 통과되기도 했다.
기술적·재정적 한계 목소리도
잊혀질 권리를 도입하면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지만 문제는 악용될 경우다.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기관이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나 표현물에 대한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노릇이다. 국내에서는 특정 사건에서 국가기관이 대규모로 자료를 삭제했다는 의혹을 받는 사례도 많다.
미국에서는 검열을 우려한다. 구글과 페이스북 등 미국 정보기술 기업들은 잊혀질 권리가 일종의 검열이라며 표현의 자유와 인터넷의 기술 특성을 옹호해왔다. 미국 언론들도 잊혀질 권리 판결을 포함한 유럽 지역의 개인정보 보호 조치들이 사생활 보호를 앞세워 미국 인터넷 기업을 견제하려는 꼼수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독일 정부는 잊혀질 권리 전담 특별 법정 설치를 검토하는 이유 중 하나로 남용을 들었다. 만약 이용자의 요청에 따른 자동 삭제 절차가 도입된다면 정치인이나 유명인에 관한 보도는 공공 이익을 위한 것이라도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자들이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독일 내무부 대변인은 우려했다.
기술적, 재정적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먼저 삭제에 들어가는 비용을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가 문제다. 구글이 삭제 요청을 받은 지 하루 만에 1만2000건의 신청이 쏟아졌다. 그것도 EU 지역만으로 제한했는데도 그렇다. 삭제할 것인지 타당성을 따지는 것은 물론, 이를 삭제하는 것 역시 엄청난 재원을 필요로 한다. 알고리즘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구글 같은 인터넷 사업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검색을 제한하는 정도다. 검색을 제한한다고 데이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유된 적이 있다면 이를 일일이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경 없는 인터넷 세상에서 삭제 요청을 접수한 뒤엔 해당 콘텐츠를 해당 국가의 구글 사이트에서만 삭제할지, 전 세계 검색 결과에서 없앨지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한 인터넷 전문가는 “이번 판결에서 사업자가 개인정보 관련 불만을 접수했을 때 타당성을 따져 삭제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해서 잊혀질 권리를 강제했다고 볼 수는 없다”며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