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무아젤 샤넬의 초상’, 마리 로랑생, 1923년, 캔버스에 유채, 92×73cm,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소장.
지금 이야기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지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전문직 여성’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1800년대 중반부터 산업혁명과 도시화 여파를 타고 많은 여성이 파리나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 일했지만 대부분 생계를 꾸리기 위한 방편으로 하녀, 공장 직공, 상점 판매원으로 일했다. 일하는 여성은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는 진취적 여성이 아니라 불행한 여성이라는 인식이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이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기가 쉬울 리 없었다.
코코 샤넬과 마리 로랑생. 두 사람은 이처럼 여성이 일하는 것 자체를 생소해하는 분위기에서 디자이너와 화가로 용기 있게 자기 길을 개척해간 선구자였다. 두 사람의 성장 스토리에는 약간 비슷한 구석이 있다. 1883년생인 샤넬은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져 고아원에서 자랐다. 수도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생계를 위해 바느질을 배운 그는 이후 부유한 남자들의 정부가 됐다. ‘가난하지만 예쁜 처녀’가 걷는 전형적인 삶을 택한 셈이다. 그러나 샤넬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남자들의 도움으로 모자 가게와 양품점을 열었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여성복을 디자인하며 마침내 파리의 고급 양장점 거리까지 진출하게 된다.
샤넬과 같은 해인 1883년 태어난 로랑생은 사생아로 아버지를 모른 채 어머니 품에서 컸다. 미술에 자질을 보여 열여덟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파리에서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 당대 아방가르드 그룹과 어울리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발전해나가기 시작한다. 흔히 로랑생의 작품세계는 큐비즘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로랑생’ 하면 떠오르는, 파스텔톤의 여성성 충만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는 데 일생을 바쳤다.
샤넬과 로랑생은 이처럼 여성 예술가가 드물던 시대에 엇비슷한 행로를 걸었던 인물들이다. 나이까지 동갑이었으니 어쩌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발레 뤼스의 무대의상과 미술을 담당한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됐고, 샤넬은 1923년 로랑생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했다. 로랑생은 이 청탁을 받아들여 푸른 드레스를 입고 한쪽 어깨를 드러낸 포즈로 의자에 기대앉은 샤넬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부드러운 곡선과 온화하고 가벼운 색조, 몽환적인 분위기의 배경이 전형적인 로랑생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샤넬은 이 초상화를 인수하는 것을 거절했다. 자신과 조금도 닮지 않은 초상이라는 게 이유였다. 어쩌면 샤넬은 이처럼 나른한 분위기의 초상화보다 활달하고 진취적인 분위기로 자신을 묘사한 작품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샤넬은 검은색 미니드레스 등 일하는 여성을 위한 단순하고 기능적인 정장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샤넬이 거절한 이 초상화는 현재 로랑생의 대표작으로 알려졌다. 이 초상화를 다시 살펴보면 샤넬이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를 한 게 아닌가 싶다. 언뜻 보면 그저 부드러운 분위기의 초상화지만, 보면 볼수록 샤넬에게 충만했던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샤넬이 인수하기를 거절한 탓에 초상화는 계속 로랑생이 소장했고, 그가 타계한 후 로랑생의 다른 3개 작품과 함께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