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몰린 인파(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책값 명목 비공식 후원금 거둬
의원이 의정활동 경험을 묶어 책으로 펴내는 것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의정활동 성과와 소신을 밝히는 행위는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출판기념회를 빙자해 ‘편법으로’ 정치자금을 모은다는 점이다.
2004년 소액 다수 후원자로부터 투명하게 정치자금을 모으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정치자금법을 개정한 이후 기부금품 모금을 위한 집회(후원회)는 금지됐다. 그러나 ‘청목회 사건’ 이후 소액 후원자 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게 국회 보좌진의 한결같은 얘기다. 청목회 사건은 청원 경찰 친목모임(청목회)이 청원경찰법 제정을 위해 회비를 거둔 다음 이를 10만 원씩 쪼개 일부 국회의원에게 후원한 것을 두고 검찰이 ‘입법 로비’라며 수사한 사건을 말한다. 서울북부지방법원은 10월 5일 청목회 사건으로 기소된 최규식, 강기정 의원에게 각각 벌금 500만 원과 90만 원을 선고했다. 이명수, 조진형 의원에게는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민주당 K의원실 보좌관은 “청목회 수사 이후 같은 회사나 단체에서 다수가 10만 원씩 쪼개 후원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풍토가 생겨났다”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의원 ‘돈가뭄’ 시달려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자서전 ‘나의 도전 나의 열정’출판기념회가 9월 6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렸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자발적 소액 다수의 후원자를 찾지 못한 의원이 돌파구로 삼는 것이 바로 ‘출판기념회’다. ‘책’을 매개로 지지자를 끌어모아 세 과시를 할 수 있고, ‘책값’ 명목으로 이른바 비공식 ‘후원금’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출판기념회는 외형상 책을 펴낸 출판사가 주최한다. 그러나 형식과 달리 내용 면에서는 사실상 의원의 ‘후원금’ 모금 행사인 경우가 적지 않다.
출판업에 종사하는 A씨는 “정치인이 펴내는 책은 1쇄 기준으로 최소 5000부, 보통 1만 부를 찍는다”며 “출판기념회 한 번 하면 대부분 소진된다”고 말했다.
의원이 출판기념회를 선호하는 이유는 형식상 출판사의 주최 행사라는 점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수입과 지출을 신고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가 책값을 지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무상으로 책을 나눠준 경우에는 선거법 위반에 해당하기 때문.
일반적으로 의원들도 동료 의원이 여는 출판기념회에 참석할 때는 ‘10만 원’ 정도를 내고 책을 한두 권 받아오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친소관계에 따라 그 액수가 달라진다. 30만 원이나 50만 원, 많게는 100만 원을 책값 명목으로 내는 경우도 있다. 사실상 출판기념회를 통해 ‘품앗이 후원’을 하는 것이다.
한나라당 H의원실 관계자는 “한번은 의원이 동료 의원 출판기념회에 100만 원을 보내라고 해서 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의뢰한 적이 있다”면서 “선관위 답변이 ‘통상적 금액이면 상관없지만, 통상적 범위를 넘어서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오해를 피하려면 후원금으로 보낸 100만 원어치 책을 다 가져와야 했지만, 그 많은 책을 가져다 어디에 쓰겠느냐”며 “몇 권 받아오고 말았다”고 말했다.
동료 의원이 보내는 ‘품앗이 후원금’ 외에도 의원이 소속된 상임위원회(이하 상임위)와 관련된 공기업이나 정부투자기관 등에서 책을 대량 구매하는 것도 관행처럼 됐다. 국회 등 대관 업무를 담당하던 B공기업 인사는 “후원회를 할 때는 후원금을 내고 영수증 처리를 했지만, 후원회를 열지 못하게 된 이후에는 책을 산다”며 “우리 회사를 관장하는 상임위 소속 의원이 출판기념회를 열면 최소 50권, 많게는 100권까지 구매한다”고 말했다. 그는 “의원과 사장의 친소관계에 따라 더 많은 책을 사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동료 의원이든 상임위 관련 기관이든 책값으로 많은 돈을 지불하면 기본적으로 책을 쓴 저자(의원)가 챙길 수 있는 인세 수입이 늘어난다. 여기까지는 공식적인 수입이다. 또 한 가지는 출판기념회를 통해 거둬들인 수익의 일정 부분을 저자인 의원과 출판사가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모 의원실 관계자의 얘기다.
대부분 출판사에서 기획출판
“국회의원 책은 대부분 기획 출판을 한다. 출판사는 책을 만들어주는 대신 일정 부수를 의원이 책임져 비용을 보전해준다. 책 한 권 펴내는 데 보통 5000만 원, 많게는 7000만 원 정도 든다. 그런데 출판기념회를 한 번 하면 1억5000만 원에서 2억 원까지 걷힌다. 행사 비용이 어느 정도 들겠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는다. 비용 조로 출판사 몫을 제하면 의원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1억 원 가까이 된다. 요즘처럼 후원금이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는 큰돈이 아닐 수 없다.”
저비용 고효율 구조로 정치자금을 모으기에는 ‘출판기념회’가 안성맞춤인 셈이다. 선관위 관계자는 “출판사가 주최하는 출판기념회를 우리가 단속할 권한은 없다”면서 “다만 출판기념회에서 정치인이 무료로 책이나 홍보물을 배포하는 행위는 선거법에 저촉돼 처벌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너무 자주 출판기념회를 여는 것도 사전 선거운동일 수 있어 눈여겨본다”고 덧붙였다.
출판기념회는 2012년 4월 총선 90일 전인 1월 12일까지 열 수 있다. 정기국회 회기 중인 11월에도 국회에 출판기념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유독 많은 이유는 출판기념회를 열 수 있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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