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는 미쳤다. 예술 작품으로 도시를 덮을 생각인가 보다.”
영국인 건축가 찰스 윌러튼(39)이 네르비온 강 둔치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이렇게 외친다. 비뚜름히 누운 햇빛을 받은 강물이 빛난다. 그는 런던에 산다. 빌바오로 건축 기행을 왔다.
“빌바오는 도시 리뉴얼의 교과서다. 예술로 도시를 재건한 성공 사례다. 가로등, 조형물 하나도 허투루 설치한 게 없다.”
빌바오 리뉴얼에 관여한 건축가 이름을 읊으면서 그가 흥분 섞인 어조로 “놀랍다(suprising result)” “기 막힌다(amazing)”는 감탄사를 되풀이한다.
빌바오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 최대 도시. 배와 쇳물 덕분에 번영했으나 1980년을 넘기면서 쇠락했다. 조선과 철강산업의 경쟁력이 동아시아에 밀리면서 은성(殷盛)하던 도시는 회색빛으로 변했다.
오래된 공업도시는 1992년부터 ‘회색’을 벗고 ‘예술’을 입는다. 도시 재건 사업을 시작한 것. 빌바오는 지금도 문화도시, 예술도시를 목표로 리뉴얼을 이어가는 중이다.
밀렌느 피에르(43)가 길이 31m, 높이 4m, 중량 180t의 녹슨 듯한 쇳덩이 앞에 섰다. 리처드 세라(후기 미니멀리즘 조각의 거장)의 설치작품 ‘더 매터 오브 타임(The matter of time)’.
“세라가 산업용 소재를 활용해 신기한 조형물을 만들었다. 쇳덩이 사이로 뒤틀린 공간이 아찔하다.”
그가 프랑스 억양 가득한 영어로 덧붙인다.
“구겐하임은 유럽에서 뜨는 곳이다. 꼭 와봐야 할 장소다.”
그는 프랑스 니스에서 버스를 타고 빌바오에 왔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Guggenheim Bilbao Museum·이하 구겐하임)은 ‘소장한 미술품’보다 ‘미술관’이 더 유명하다. 구겐하임은 ‘예술에 의한 도시 재건 프로젝트’의 중심에 섰다. 빌바오의 랜드마크다.
구겐하임은 1997년 강변의 옛 공업지대에 들어섰다. 공장, 창고, 화물기차역 터에 미술관을 세웠다. 프랭크 개리(건축의 노벨상 격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거장)가 디자인을 맡았다. 티타늄, 유리, 석회암으로 꾸민 외관이 시각 환상을 일으킨다. 20세기 건축의 아방가르드(전위·前衛)다.
“빌바오는 도시 리뉴얼의 교과서”
오브제가 있는 강변 산책로.
어스름이 깔린다. 사람들이 바르(bar)에서 세르베사(cerveza·맥주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를 들이켠다. ‘산 미구엘’과 노천카페의 즉흥연주가 잘 어울린다.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오르던 연인이 입을 맞춘다. 강물 위에서 카누가 얄랑거린다. 저녁 운동 나온 시민이 미술관 앞 강안을 달린다. 강물에 비친 구겐하임이 일렁인다. 미술관 앞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소년이 웃는다. 예술로 승화한 공공시설의 주인은 관광객이 아닌 시민. 맥주잔이 복닥복닥하게 오간다. 사람이 하하하 웃는다. 밤이 느리게 익어간다.
빌바오는 철광석을 실은 배가 오르내리던 강을 시민 휴식처로 바꿨다. 미술관을 짓고 강안을 정비하면서 꿩도 먹고, 알도 먹었다. 시민 삶의 질을 높인 게 꿩, 관광객이 몰려든 게 알이다. 빌바오에서 나고 자란 후안 엔리케(44)가 구겐하임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빌바오는 내세울 것 없는 조악한 곳이었다. 공공장소를 아름답게 바꾸면서 사유지도 변모했다. 내가 사는 곳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느낀 것이다. 시민이 도시를 꾸미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공공장소가 선도하고 사유지가 따라가는 방식으로 리뉴얼이 이뤄졌다.”
전위예술을 닮은 미술관 하나를 짓거나, 환경 개선 사업에 돈을 쏟아붓는다고 어느 도시나 도시 재생 작업에 성공하는 것은 아닐 터. 예쁜 공간을 조성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 공간을 꾸리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사람의 일상으로 연결되지 않는 닫힌 공간은 의미가 없다. 전임 서울시장은 오페라하우스를 짓는다느니, 디자인 서울을 만든다느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으나 시민은 피부로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새빛둥둥섬처럼 시민과 어울리지 못하는, 겉만 예쁜 닫힌 공간이 한국에 널렸다.
금속공예품을 연상케 하는 흰색 다리 너머로 동이 뜬다. 굼벵이를 닮은 앙증맞은 전차가 운행을 시작한다. ‘굼벵이’가 잔디 깔린 철길을 달린다. 트램(노면전차)을 타러 가는 길에 ‘빌바오 리아 2000(Bilbao Ria 2000·이하 리아 2000)’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오브제가 있는 강변 산책로처럼 ‘에지 있다’고 느껴지는 공간엔 어김없이 이 팻말이 섰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리아 2000은 공장터를 비롯한 버려진 땅에 ‘에지 있는’ 아파트, 호텔을 지어 민간에 판다. 그렇게 얻은 개발 수익금을 이용해 공공장소의 예술성, 디자인을 미(美)의 극한으로 밀고 나간다. 가로등을 달고, 신호등을 세우고,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거나, 벤치를 놓을 때도 미친 듯 미를 추구한다. 스포츠 시설이나 공원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스비스리 다리는 교량이기에 앞서 예술품이요,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지하철은 미니멀리즘(단순함을 추구하는 문화 흐름)의 진수다.
공공장소가 선도 사유지가 따라가는 방식
빌바오는 공공디자인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색을 사용한다. 트램 정거장, 표지판, 쓰레기 분리수거함(위부터).
“공공 부문도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정부, 지방자치단체가 예산만 탓하며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낭비 아니냐고? 닫힌 공간을 꾸리는 데 허투루 돈 쓰는 도시와 열린 공간에 투자해 도시 가치를 높이면서 시민에게 쾌적성을 제공하는 도시는 다르다. 빌바오는 공공장소를 시민이 ‘지나가는 곳’이 아닌 ‘머무는 곳’으로 바꿨다. 시민은 리아 2000이 꾸린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고, 휴식을 취하며 산책을 한다. 그러면서 삶을 반추하고, 미래를 꿈꾼다.
도시 재건축의 비전, 전략을 수립하는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이하 메트로폴리 30)은 리아 2000의 두뇌 격이다. 150개 공기업, 민간 기업이 참여한 민관 협의체. 900명에 달하는 전문가가 이 조직에 조언한다. ‘메트로폴리 30’은 “공공에 좋은 것은 민간에도 좋다”는 의견 합일을 이끌어냈다. 예술, 디자인에 미친 듯한 네르비온 강의 풍경은 이 같은 합의에서 비롯한 것이다.
바스크 사람은 오후 2~4시 낮잠을 잔다. 노부부가 낮잠을 자지 않고 오페라 극장 앞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느긋하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부부의 대화가 따듯하게 느껴진다. 빌바오는 ‘의자가 가득한 도시’다. 아름다운 곳엔 어김없이 벤치가 줄 지어 앉았다. 사람은 벤치에서 얘기를 나누고, 쉬고, 아이패드를 들여다보고. 담배를 피우면서 도시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빌바오 대중교통은 무지개를 닮은 원색이다. 연두색, 빨간색, 노란색…. 런던에 새빨간 이층버스가 그렇듯 원색은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대중교통의 콘셉트는 앙증맞다. 지하철 출구는 트램처럼 굼벵이를 모티프로 삼았다. 원색의 버스, 트램을 타고 오가는 사람의 표정이 상쾌하다. 아름다운 곳에서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빌바오는 사람을 느긋하게 하면서도 설레게 하는 도시다.
시내버스.
알폰소 세에라 메크로폴리 30 사무처장은 “시민을 맨 앞에 둔 공공의 재건축 비전이 결국 민간 이익에 합치한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한국 도시는 헐리고 새로 지어지기를 반복했다. 집 장사들은 개발 이익에 매몰됐다. 공공기관, 공기업도 비슷했다. 더 많은 돈을 끌어모으고자 하늘로 치솟은 철학 없는 건물의 경박함은 도시를 천박하게 만든다. 빌바오는 재건축하면서 옛것을 버리지 않는다. 한국으로 치면 한옥 냄새 나는 건물을 신시가지에 올린다. 그러면서도 디자인을 일신해 후세를 위한 전통을 창출한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실험이 빌바오에서 이뤄진다. 아방가르드한 지하공간 프로젝트다. 하디드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프라자를 설계했다. ‘디자인 서울’이 서울시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까닭은 뭘까. 세계 각국 도시를 경박한 방식으로 흉내 내는 데 급급해서는 아닐까. 빌바오의 리더들은 현시욕으로 ‘오래된 도시의 미래’를 준비하지 않았다. 시민이 어떡하면 쾌적할지, 어떡하면 행복할지, 어떡하면 느긋할지를 맨 앞에 둔다.
금속공예품을 닮은 스비스리 다리(왼쪽). 빌바오는 놀이터는 물론 의자 하나를 놓을 때도 삶의 질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