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자기 목소리 내는 걸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독재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모든 것을 조심하던 시대는 이미 옛날 일이 되었다.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분화는 수많은 이익집단이나 직능단체들을 출현시켰고, 삶의 현장 속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온전히 지켜내려는 발언과 행동들이 봇물 터지듯 확산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저마다 응당 확보해야 할 몫과 인정받고 싶은 바람을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건강할수록 역동적이고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거 권위주의체제 시절에 선호됐던 질서정연함이란 기실 ‘회칠한 무덤’ 비슷한 것이었다. 겉은 화사한 포장으로 가렸지만 그 안에서는 불만과 좌절, 그리고 부정부패의 웅덩이가 고여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새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여러 사태들을 단순한 소란이나 비난받아야 할 무질서 상황으로만 보는 것은 짧은 생각이다. 그런 시각은 일사불란했던 과거에 대한 잘못된 향수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를 ‘발본색원’하고 어지럽게 얽혀 있는 사태를 단칼에 ‘척결’해야 된다는 생각은 몽매한 군사독재 시절의 빛 바랜 강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 태도는 어렵사리 뿌리내려 가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몫과 권리를 주장하는 태도와 추진방식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얼굴을 보여준다. 예컨대, 역대 정권에서 누적되어온 잘못된 의료복지정책이 의료현실을 왜곡시킨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당사자들끼리 합의한 사항을 나 몰라라 하는 의사들의 집단 폐업사태는 막무가내의 떼쓰기가 아닐 수 없다.
경제 분야에서는 힘과 크기를 내세운 재벌과 금융집단들이 국민경제를 볼모 삼아 개혁에 반발하고 있다. 의석수를 앞세운 정당들은 명분도 원칙도 없는 싸움을 일삼으며 상대방이 먼저 양보할 것만을 요구한다.
개탄스러운 것은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것’이 사회적으로 널리 학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세를 과시하는 세력이 아이가 아니라 덩치 큰 어른이라면 상황이 훨씬 심각해진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얻으려고 하는 경우, 과격한 언사와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차분한 어조와 온화한 얼굴로 얘기하면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우려할 만한 현상은 이런 신경증적 질환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놓아야 할 지식인 사회도 이런 풍조에 깊숙이 감염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안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방에 대한 폭언과 왜곡을 서슴지 않는 사회비판가들, 심오한 사유의 이미지로 치장하고 선정주의적 이벤트에 매달리는 자칭 사상가들은 우리 사회를 갈수록 강퍅하게 하고 천박하게 만든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언론개혁이 매우 중요한 시대적 과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가지 방법만이 만병통치약이라고 강변하고, 그 방법에 이견이 있는 모든 사람을 목청껏 매도하고 비아냥대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군사독재 파시즘으로부터 막 벗어난 지금, 일상의 곳곳에 퍼진 파시즘의 징후를 보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파시즘은 조용하고 반성적인 말과 실천을 혐오하며, 내면적 지혜를 위선이라 비꼬면서 힘과 어거지와 화려한 선전선동을 선호한다. 열병처럼 번지는 거친 목소리와 핏대 선 얼굴들은 일상적 파시즘의 징후일 수 있다. 그것은 포스트 군사독재 시대에 우리가 넘어서야 할 암울한 자화상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저마다 응당 확보해야 할 몫과 인정받고 싶은 바람을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건강할수록 역동적이고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거 권위주의체제 시절에 선호됐던 질서정연함이란 기실 ‘회칠한 무덤’ 비슷한 것이었다. 겉은 화사한 포장으로 가렸지만 그 안에서는 불만과 좌절, 그리고 부정부패의 웅덩이가 고여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새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여러 사태들을 단순한 소란이나 비난받아야 할 무질서 상황으로만 보는 것은 짧은 생각이다. 그런 시각은 일사불란했던 과거에 대한 잘못된 향수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를 ‘발본색원’하고 어지럽게 얽혀 있는 사태를 단칼에 ‘척결’해야 된다는 생각은 몽매한 군사독재 시절의 빛 바랜 강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 태도는 어렵사리 뿌리내려 가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몫과 권리를 주장하는 태도와 추진방식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얼굴을 보여준다. 예컨대, 역대 정권에서 누적되어온 잘못된 의료복지정책이 의료현실을 왜곡시킨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당사자들끼리 합의한 사항을 나 몰라라 하는 의사들의 집단 폐업사태는 막무가내의 떼쓰기가 아닐 수 없다.
경제 분야에서는 힘과 크기를 내세운 재벌과 금융집단들이 국민경제를 볼모 삼아 개혁에 반발하고 있다. 의석수를 앞세운 정당들은 명분도 원칙도 없는 싸움을 일삼으며 상대방이 먼저 양보할 것만을 요구한다.
개탄스러운 것은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것’이 사회적으로 널리 학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세를 과시하는 세력이 아이가 아니라 덩치 큰 어른이라면 상황이 훨씬 심각해진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얻으려고 하는 경우, 과격한 언사와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차분한 어조와 온화한 얼굴로 얘기하면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우려할 만한 현상은 이런 신경증적 질환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놓아야 할 지식인 사회도 이런 풍조에 깊숙이 감염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안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방에 대한 폭언과 왜곡을 서슴지 않는 사회비판가들, 심오한 사유의 이미지로 치장하고 선정주의적 이벤트에 매달리는 자칭 사상가들은 우리 사회를 갈수록 강퍅하게 하고 천박하게 만든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언론개혁이 매우 중요한 시대적 과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가지 방법만이 만병통치약이라고 강변하고, 그 방법에 이견이 있는 모든 사람을 목청껏 매도하고 비아냥대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군사독재 파시즘으로부터 막 벗어난 지금, 일상의 곳곳에 퍼진 파시즘의 징후를 보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파시즘은 조용하고 반성적인 말과 실천을 혐오하며, 내면적 지혜를 위선이라 비꼬면서 힘과 어거지와 화려한 선전선동을 선호한다. 열병처럼 번지는 거친 목소리와 핏대 선 얼굴들은 일상적 파시즘의 징후일 수 있다. 그것은 포스트 군사독재 시대에 우리가 넘어서야 할 암울한 자화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