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일 목요일 2시. 이날도 어김없이 서울 종로3가 탑골공원 앞에는 보라색 두건을 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이 모여들었다. 여느때처럼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 를 마친 뒤 조촐하지만 특별한 행사가 이어졌다. 비전향 장기수 김동기씨(68)가 출소 1년반 만에 산문집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를 내고, 33년 옥살이 동안 어머니가 되어준 민가협 어머니들께 책을 바치는 행사였다.
하지만 출간에 대한 축하보다 곧 있을 이별에 대한 섭섭함이 앞섰다. 9월 초로 예정된 비전향 장기수 북한 송환 예정자 명단에는 김동기씨의 이름도 있다. 33년의 기다림 끝에 만나자마자 이별인 셈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머지않아 고향 땅(함경남도 단천)을 밟는다는 기대감에 상기된 표정이었다. 탑골공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때는 수학여행 온 학생처럼 즐거워 보였다. 그가 평양상업대학을 졸업한 뒤 상업성(국세청)에 근무하다 정치공작원으로 남파된 것이 66년, 주민의 신고로 군경에 포위돼 허리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가 무기형을 확정받은 게 67년 12월이니 여행치고는 너무 길고 고단한 일정이었다.
지난해 광주교도소를 출소한 뒤 김씨의 보금자리가 된 광주 ‘통일의 집’에는 김씨 외에도 리경찬 이재룡 이공순씨 등 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살고 있다. 모두 이번 송환자 명단에 들면서 ‘통일의 집’은 연일 잔칫집 분위기다.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준 사람들, 또 고향 땅으로 돌아가도록 애써준 사람들이 속속 찾아와 축하인사와 이별의 눈물을 한꺼번에 흘리기 때문이다. 김씨는 떠나는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찾아온 분들이 흘리는 게 기쁨의 눈물인가 했더니 슬픔의 눈물이었어요. 내 나이 내년이면 일흔이니 다시는 못 만나리라는 두려움이 앞서는 거지요. 지금은 서신왕래도 안 되잖아요. 하지만 이번 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이 다시 연결된다는 소식을 듣고 희망을 가졌어요.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엄한 군사분계선에 구멍을 뚫는 의미 정도는 된다고 봅니다. 이번에 가더라도 제2의 고향 광주, 무등산 애인을 다시 볼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품고 갑니다.”
‘통일의 집’에서 막내로 불리는 이재룡씨(56)는 송환 예정자 중 유일한 50대의 노총각이다. 그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군 선양면 농고리로 남녘 땅이라는 것부터가 이번 송환 예정자 중 특이한 이력이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재룡씨의 맏형 재현씨는 인민군에 복무했다. 재룡씨의 부모님은 피난 도중 사망해 그는 일곱 살 나이에 고아가 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부가 됐는데 67년 그가 탄 배가 그만 군사분계선을 넘고 말았다. 나포 선원 송환 때 병 때문에 잔류했다 형님과 상봉하면서 그는 북녘 땅에 눌러앉았다. 그러다 70년 정치공작원이 되어 남파됐다 체포돼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대전교도소에서 구타를 견디지 못해 전향했다가 다시 북한에 대한 발언이 문제돼 반공법 위반죄로 10년 추가형을 받은 뒤 비전향 장기수가 되는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
그는 요즘 두 가지에 감사한다. 첫째 10년을 추가로 감옥에 있으면서도 전향하지 않은 것이고, 둘째 출옥 후 ‘한눈팔지’ 않고 미혼인 채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송환 기회를 얻었고,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형님이 있는 북으로 가게 됐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 것은 양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인민군 군의관 출신 의사로 지난해 시집 ‘잊히지 않는 사람들’로 알려진 류춘도 여사는 그가 출소한 뒤 직접 광주로 찾아와 모자의 인연을 맺었다. 그 뒤 이씨에게 운전을 배우도록 하고 중고차도 사주며 이곳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얼마 전 서울에 올라왔을 때 어머니께서 판문점 부근으로 가자고 하시더군요. 한바퀴 돌고 오는데 어머니가 우셨어요. 연세가 벌써 일흔넷인데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기약도 없다고 흐느끼시는 거예요.”
이재룡씨보다 더 애틋한 사례는 신인영씨(71)의 경우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신씨는 6·25전쟁 때 홀로 월북했고 북한에서 결혼해 3남매를 두었다. 하지만 남한에는 그의 석방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던 93세의 노모가 살아 있다. 그가 북으로 가면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권-종교단체들로 구성된 비전향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는 인도적 차원에서 신인영씨가 노모를 모시고 북으로 갈 수 있도록 정부당국에 요청할 계획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또 출소 후 좋은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린 비전향 장기수가 송환소식에 마음이 흔들려 ‘다 포기하고 북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말리느라 진땀을 빼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중에도 송환추진위가 파악한 88명의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송환을 희망한 62명은 조용히 이삿짐을 꾸리고 있다. 무엇을 가지고 갈까, 무엇을 입고 갈까, 북에 있는 가족에게 줄 선물은 무엇이 좋을까 등 행복한 고민을 하며 하루하루 떠날 날짜만 꼽고 있다.
그들의 짐꾸러미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김동기씨는 “국가기밀이나 기술 유출 문제 때문에 컴퓨터 외에는 무엇이든 괜찮다고 들었다”며 “광주의 중소기업체 사장들이 TV며 냉장고를 주었는데 가지고 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씨의 짐꾸러미에는 냉장고나 TV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담겨 있다. 그는 얼마 전 제주도와 해남 땅끝마을을 들러 흙과 돌을 담아왔다. 또 광주교도소 시절 애인처럼 매일 바라보던 무등산에서 돌을 하나 줍고 낙동강에서는 모래를 펐다. 낙동강은 그가 6·25전쟁에 인민군 소년병으로 참전해 싸운 곳이다.
“인생의 절반인 35년을 남쪽에서 살았어요. 따져보면 북에서 34년, 남에서 35년이니 남쪽에서 산 기간이 더 긴 셈이죠. 죽기 전에 통일이 되면 여한이 없겠지만 이렇게 흙과 돌을 가지고 가서 자식들에게 죽거든 내 무덤에 뿌려달라고 할 겁니다.”
이재룡씨의 가방은 김씨 것보다는 가벼운 듯했다. 29년 옥살이에 는 것은 책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대부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제 몇 권 남지 않았다고 했다. 편지와 손때 묻은 책 2, 3권만 챙겨갈 생각이다. 특히 교도소에서 친구나 다름없던 영어사전은 꼭 가지고 갈 짐에 꾸려놓았다.
김씨와 이씨는 얼마 전 자신들이 복역한 광주교도소에 찾아가 인사까지 마쳤다. 교도당국은 한때 전향을 강요하며 구타를 가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아 북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 할 일은 북의 가족에게 전할 선물을 고르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두고두고 고민할 참이라고 했다.
그러나 62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송환의 설렘에 젖어 있는 동안 한켠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전향 장기수들이다. 이들은 남북한 두 정상이 송환 대상자를 ‘비전향 장기수’로 못박은 것에 못내 애통해했다. 전남 무안군 해제면 양매리에 살고 있는 전향 장기수 박종린씨(68)도 그중 한 사람이다.
박씨는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59년 남파됐다 체포돼 35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종교인들의 권유로 전향서에 서명했지만 체제에 대한 신념을 바꾼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하느님께 전향했을 뿐”이다. 북한에는 의사인 아내와 딸이 있다. 남파 당시 4개월도 안 됐던 딸이 이제 43세가 됐다. 중국에 살고 있는 형수를 통해 마지막으로 북한의 가족 소식을 들은 게 96년 6월. 그때 자신에게 손주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어떻게 전향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당신은 전향자니까 대한민국 사람인데 왜 북으로 가려 하느냐고 하면 안 됩니다. 70년대에 전향한 사람 중 상당수가 가정을 꾸리지 않고 홀로 지내면서 고향 갈 날만 그리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비록 이번에는 기회가 오지 않더라도 다음에는 북송 희망자 모두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현재의 상황대로라면 다음 기회도 쉽게 오리라 기대합니다.”(박종린)
전남 무안군 해제중학교에서 매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박씨는 얼마 전 광주 ‘통일의 집’ 송환 예정자들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 다른 3명의 전향 장기수도 참석한 이 자리는 끝내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 서러움에 한바탕 눈물바다가 됐다.
그는 이번 기회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던 전향자들을 수소문하기로 했다. 추측컨대 전향자가 족히 수백명은 되는데 소재지가 파악된 사람은 10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들 중 북쪽 출신은 대부분 송환을 희망한다고 보고, 이들을 중심으로 ‘전향 장기수 송환을 위한 모임’을 만들 계획이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는 전향자들의 애통함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설득하는 중이다. 추진위 권오헌 상임대표는 “전향자들의 문제를 잊은 게 아니고 1차로 비전향자 송환이 마무리되면 곧 이 문제에 착수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강제 전 향이었다면 비전향 장기수와 같은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고 자발적인 전향이었다 해도 이산가족 차원에서 상봉을 추진할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추진위측은 전향자들을 달래는 한편, 소재지 파악이 되지 않는 비전향자 문제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권대표는 “추진위가 비전향 장기수 한명 한명에게 의사를 물어 작성한 송환자 명단이 62명인데, 최근 장기수 송환문제가 알려지면서 75년 ‘사회안전법’ 이후 은신했던 비전향 장기수들이 자신도 송환 대상이 되는지 문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전한다. 현재 통일부와 법무부가 이들의 소재지를 확인해 송환 여부를 묻고 있는데 추진위는 이들의 인적사항과 주소지 등 정보공개를 요청해 놓은 상태다. 민간단체가 앞장서 이들과 접촉해 송환의지를 확인한다면 최종 명단은 70명을 넘을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송환은 우리가 분단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시대를 여는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남북간에 가장 민감한 부분을 해결하고 나면 다른 문제들은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죠. 송환이 곧 통일의 물꼬를 틀 겁니다.” 권오헌 대표의 말이다.
하지만 출간에 대한 축하보다 곧 있을 이별에 대한 섭섭함이 앞섰다. 9월 초로 예정된 비전향 장기수 북한 송환 예정자 명단에는 김동기씨의 이름도 있다. 33년의 기다림 끝에 만나자마자 이별인 셈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머지않아 고향 땅(함경남도 단천)을 밟는다는 기대감에 상기된 표정이었다. 탑골공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을 때는 수학여행 온 학생처럼 즐거워 보였다. 그가 평양상업대학을 졸업한 뒤 상업성(국세청)에 근무하다 정치공작원으로 남파된 것이 66년, 주민의 신고로 군경에 포위돼 허리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가 무기형을 확정받은 게 67년 12월이니 여행치고는 너무 길고 고단한 일정이었다.
지난해 광주교도소를 출소한 뒤 김씨의 보금자리가 된 광주 ‘통일의 집’에는 김씨 외에도 리경찬 이재룡 이공순씨 등 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살고 있다. 모두 이번 송환자 명단에 들면서 ‘통일의 집’은 연일 잔칫집 분위기다.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준 사람들, 또 고향 땅으로 돌아가도록 애써준 사람들이 속속 찾아와 축하인사와 이별의 눈물을 한꺼번에 흘리기 때문이다. 김씨는 떠나는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찾아온 분들이 흘리는 게 기쁨의 눈물인가 했더니 슬픔의 눈물이었어요. 내 나이 내년이면 일흔이니 다시는 못 만나리라는 두려움이 앞서는 거지요. 지금은 서신왕래도 안 되잖아요. 하지만 이번 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이 다시 연결된다는 소식을 듣고 희망을 가졌어요.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엄한 군사분계선에 구멍을 뚫는 의미 정도는 된다고 봅니다. 이번에 가더라도 제2의 고향 광주, 무등산 애인을 다시 볼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품고 갑니다.”
‘통일의 집’에서 막내로 불리는 이재룡씨(56)는 송환 예정자 중 유일한 50대의 노총각이다. 그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군 선양면 농고리로 남녘 땅이라는 것부터가 이번 송환 예정자 중 특이한 이력이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재룡씨의 맏형 재현씨는 인민군에 복무했다. 재룡씨의 부모님은 피난 도중 사망해 그는 일곱 살 나이에 고아가 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부가 됐는데 67년 그가 탄 배가 그만 군사분계선을 넘고 말았다. 나포 선원 송환 때 병 때문에 잔류했다 형님과 상봉하면서 그는 북녘 땅에 눌러앉았다. 그러다 70년 정치공작원이 되어 남파됐다 체포돼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대전교도소에서 구타를 견디지 못해 전향했다가 다시 북한에 대한 발언이 문제돼 반공법 위반죄로 10년 추가형을 받은 뒤 비전향 장기수가 되는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
그는 요즘 두 가지에 감사한다. 첫째 10년을 추가로 감옥에 있으면서도 전향하지 않은 것이고, 둘째 출옥 후 ‘한눈팔지’ 않고 미혼인 채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송환 기회를 얻었고,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형님이 있는 북으로 가게 됐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 것은 양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인민군 군의관 출신 의사로 지난해 시집 ‘잊히지 않는 사람들’로 알려진 류춘도 여사는 그가 출소한 뒤 직접 광주로 찾아와 모자의 인연을 맺었다. 그 뒤 이씨에게 운전을 배우도록 하고 중고차도 사주며 이곳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얼마 전 서울에 올라왔을 때 어머니께서 판문점 부근으로 가자고 하시더군요. 한바퀴 돌고 오는데 어머니가 우셨어요. 연세가 벌써 일흔넷인데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기약도 없다고 흐느끼시는 거예요.”
이재룡씨보다 더 애틋한 사례는 신인영씨(71)의 경우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신씨는 6·25전쟁 때 홀로 월북했고 북한에서 결혼해 3남매를 두었다. 하지만 남한에는 그의 석방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던 93세의 노모가 살아 있다. 그가 북으로 가면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권-종교단체들로 구성된 비전향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는 인도적 차원에서 신인영씨가 노모를 모시고 북으로 갈 수 있도록 정부당국에 요청할 계획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또 출소 후 좋은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린 비전향 장기수가 송환소식에 마음이 흔들려 ‘다 포기하고 북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말리느라 진땀을 빼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중에도 송환추진위가 파악한 88명의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송환을 희망한 62명은 조용히 이삿짐을 꾸리고 있다. 무엇을 가지고 갈까, 무엇을 입고 갈까, 북에 있는 가족에게 줄 선물은 무엇이 좋을까 등 행복한 고민을 하며 하루하루 떠날 날짜만 꼽고 있다.
그들의 짐꾸러미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김동기씨는 “국가기밀이나 기술 유출 문제 때문에 컴퓨터 외에는 무엇이든 괜찮다고 들었다”며 “광주의 중소기업체 사장들이 TV며 냉장고를 주었는데 가지고 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씨의 짐꾸러미에는 냉장고나 TV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담겨 있다. 그는 얼마 전 제주도와 해남 땅끝마을을 들러 흙과 돌을 담아왔다. 또 광주교도소 시절 애인처럼 매일 바라보던 무등산에서 돌을 하나 줍고 낙동강에서는 모래를 펐다. 낙동강은 그가 6·25전쟁에 인민군 소년병으로 참전해 싸운 곳이다.
“인생의 절반인 35년을 남쪽에서 살았어요. 따져보면 북에서 34년, 남에서 35년이니 남쪽에서 산 기간이 더 긴 셈이죠. 죽기 전에 통일이 되면 여한이 없겠지만 이렇게 흙과 돌을 가지고 가서 자식들에게 죽거든 내 무덤에 뿌려달라고 할 겁니다.”
이재룡씨의 가방은 김씨 것보다는 가벼운 듯했다. 29년 옥살이에 는 것은 책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대부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제 몇 권 남지 않았다고 했다. 편지와 손때 묻은 책 2, 3권만 챙겨갈 생각이다. 특히 교도소에서 친구나 다름없던 영어사전은 꼭 가지고 갈 짐에 꾸려놓았다.
김씨와 이씨는 얼마 전 자신들이 복역한 광주교도소에 찾아가 인사까지 마쳤다. 교도당국은 한때 전향을 강요하며 구타를 가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아 북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 할 일은 북의 가족에게 전할 선물을 고르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두고두고 고민할 참이라고 했다.
그러나 62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송환의 설렘에 젖어 있는 동안 한켠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전향 장기수들이다. 이들은 남북한 두 정상이 송환 대상자를 ‘비전향 장기수’로 못박은 것에 못내 애통해했다. 전남 무안군 해제면 양매리에 살고 있는 전향 장기수 박종린씨(68)도 그중 한 사람이다.
박씨는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59년 남파됐다 체포돼 35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종교인들의 권유로 전향서에 서명했지만 체제에 대한 신념을 바꾼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하느님께 전향했을 뿐”이다. 북한에는 의사인 아내와 딸이 있다. 남파 당시 4개월도 안 됐던 딸이 이제 43세가 됐다. 중국에 살고 있는 형수를 통해 마지막으로 북한의 가족 소식을 들은 게 96년 6월. 그때 자신에게 손주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어떻게 전향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당신은 전향자니까 대한민국 사람인데 왜 북으로 가려 하느냐고 하면 안 됩니다. 70년대에 전향한 사람 중 상당수가 가정을 꾸리지 않고 홀로 지내면서 고향 갈 날만 그리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비록 이번에는 기회가 오지 않더라도 다음에는 북송 희망자 모두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현재의 상황대로라면 다음 기회도 쉽게 오리라 기대합니다.”(박종린)
전남 무안군 해제중학교에서 매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박씨는 얼마 전 광주 ‘통일의 집’ 송환 예정자들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 다른 3명의 전향 장기수도 참석한 이 자리는 끝내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 서러움에 한바탕 눈물바다가 됐다.
그는 이번 기회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던 전향자들을 수소문하기로 했다. 추측컨대 전향자가 족히 수백명은 되는데 소재지가 파악된 사람은 10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들 중 북쪽 출신은 대부분 송환을 희망한다고 보고, 이들을 중심으로 ‘전향 장기수 송환을 위한 모임’을 만들 계획이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는 전향자들의 애통함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다고 설득하는 중이다. 추진위 권오헌 상임대표는 “전향자들의 문제를 잊은 게 아니고 1차로 비전향자 송환이 마무리되면 곧 이 문제에 착수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강제 전 향이었다면 비전향 장기수와 같은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고 자발적인 전향이었다 해도 이산가족 차원에서 상봉을 추진할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추진위측은 전향자들을 달래는 한편, 소재지 파악이 되지 않는 비전향자 문제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권대표는 “추진위가 비전향 장기수 한명 한명에게 의사를 물어 작성한 송환자 명단이 62명인데, 최근 장기수 송환문제가 알려지면서 75년 ‘사회안전법’ 이후 은신했던 비전향 장기수들이 자신도 송환 대상이 되는지 문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전한다. 현재 통일부와 법무부가 이들의 소재지를 확인해 송환 여부를 묻고 있는데 추진위는 이들의 인적사항과 주소지 등 정보공개를 요청해 놓은 상태다. 민간단체가 앞장서 이들과 접촉해 송환의지를 확인한다면 최종 명단은 70명을 넘을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송환은 우리가 분단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시대를 여는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남북간에 가장 민감한 부분을 해결하고 나면 다른 문제들은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죠. 송환이 곧 통일의 물꼬를 틀 겁니다.” 권오헌 대표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