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유조선 비랏이 11월 28일(현지 시간) 튀르키예 배타적경제수역에서 우크라이나 수상 자폭 드론 ‘시베이비’의 공격을 받고 불길에 휩싸였다. 우크라이나 보안국 제공
통상 파괴 작전, 잠수함에서 드론으로
적극적으로 통상 파괴 작전을 편 대표 사례가 양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세계 최강 영국 해군과의 정면 승부가 어렵다 보고 U-보트를 대량 건조했다. U-보트 수백 척으로 영국을 오가는 배를 무차별 공격하는 이른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편 것이다. 해외 식민지에 경제를 의존하던 영국 입장에서 독일의 통상 파괴 작전은 대단히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을 오가는 배를 선적 불문하고 공격한 전략은 중립국마저 적으로 만들었다. 특히 미국은 1915년 자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의 공격에 격침되자 대독 전선에 뛰어들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결과적으로 독일 패망을 앞당기는 패착이 됐다.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잠수함을 이용한 통상 파괴 작전에 주력했다. 이에 미국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각종 무기와 물자가 월평균 30만t 이상 수장됐다. 그러자 미국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독일 잠수함을 잡는 데 투입했다. 미국의 호위 항공모함 100여 척과 구축함 수백 척, 항공기 수천 대가 대서양 전역에서 독일 잠수함들을 파괴했다. 독일의 통상 파괴 작전은 다시 실패로 끝났다.
치열한 통상 파괴 작전은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주요 무대다. 과거 독일이 미국·영국과의 압도적 해군력 격차를 극복하고자 잠수함을 선택했다면, 지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맞서 드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개전 당시 우크라이나는 해군이 없다시피 했다. 경비정 몇 척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수상함이 없었다. 단 1척 있던 구형 호위함을 자침한 뒤 승조원 전원을 지상군으로 재배치했다. 반면 러시아는 순양함과 호위함, 초계함, 잠수함 등으로 이뤄진 흑해함대로 우크라이나 해역을 봉쇄했다.
대형 유조선도 일격에 격침 가능
러시아의 해상 봉쇄는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세계경제에도 상당한 피해를 안겼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리는 곡창지대이자 세계적인 밀 수출 국가다. 러시아가 곡물 수출항을 틀어막고 선박 통행을 차단하자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했다. 국제사회 중재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022년 7월 ‘흑해곡물협정’을 맺고 곡물 수출 화물선의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이 흑해에서 미사일·드론을 이용한 난타전을 벌이면서 협정은 이내 유명무실화됐다. 양측의 해상 난타전은 2023년 다소 소강 상태를 보이다가 우크라이나가 공중·수상 자폭 드론으로 해군을 재정비하고 공세에 나선 지난해 봄 다시 격화됐다.당초 우크라이나의 드론은 오데사 인근과 크림반도 해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드론 항속거리가 점점 길어지면서 이제 흑해 전역에 출몰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올해 가을부터 러시아의 석유 수출 인프라를 파괴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의 해상 드론 공격 대상은 해안 정유소와 석유 수출 항구에서 공해상 유조선으로 확대됐다. 11월 28일(이하 현지 시간) 튀르키예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항해하던 러시아 유조선 카이로스와 비랏이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을 받았다. 2척 모두 감비아 선적이지만 러시아 그림자 함대 일원으로 제재를 받는 대형 유조선이다. 이들 유조선은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끄고 튀르키예 해안에서 51~65㎞ 거리를 유지하며 러시아 노보로시스크로 향하던 중 인근 해역에 매복해 있던 우크라이나 ‘시베이비’ 수상 자폭 드론의 공격을 받았다. 시베이비는 길이 6m, 폭 2m의 소형 자폭 드론이다. 최대 850㎏ 폭발물을 싣고 1000㎞를 항해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초대형 유조선도 일격에 침몰시킬 수 있다. 다만 카이로스와 비랏을 공격한 시베이비는 항속거리를 늘리려고 연료를 더 싣는 대신 탄두 중량을 줄였다. 게다가 피격된 카이로스와 비랏은 기름을 실으러 가던 빈 배였다. 결과적으로 대규모 유폭과 화재는 피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선박 공격 범위는 흑해에 국한되지 않는다. 11월 30일에는 서아프리카 세네갈 다카르 항구 인근에서 파나마 선적 유조선 메르신호가 드론 공격을 받았다. 이 선박은 서류상 튀르키예 회사 소속이지만, 러시아와 세네갈을 오가며 불법 석유 환적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 배는 기관실을 공격당해 선미 부분이 침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태가 우크라이나 정보기관 소행이라면 해외에서 드론을 조달해 공해상의 러시아 연루 선박을 공격한 첫 사례가 된다.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계속되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를 해적 행위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을 선언했다. 푸틴 대통령은 12월 2일 모스크바 투자포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의 해상 드론 공격을 막는) 가장 근본적 해결책은 우크라이나를 바다로부터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다. 그럼 해상에서의 해적 행위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일부 국가의 유조선이 러시아 선박 공격에 관여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대응 조치를 취하겠다”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우방국 선박도 러시아군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경고 발언이 나온 날 우크라이나는 튀르키예 인근 해역에서 자폭 드론을 사용해 러시아 유조선 미드볼가 2호를 공격했다.
우크라이나가 드론 공격 의지를 꺾지 않고, 러시아 또한 제3국 선박에 대한 보복 의지까지 밝히자 유럽 국가들은 다급해졌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자국 EEZ에서의 파괴 활동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루마니아는 12월 3일 자국 해안으로부터 67㎞ 떨어진 국제 수역에서 우크라이나의 수상 자폭 드론 1대를 파괴했다. 국제 수역에서 민간 선박을 공격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명분에서였다. 다만 이들 국가가 우크라이나를 제지하고 나선 진짜 이유는 통상 파괴 작전이 러시아의 과잉 보복으로 이어져 자기네 해상교통로가 위협받을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최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오가는 유조선을 공격하는 데 투입한 ‘시베이비’ 드론. 우크라이나 보안국 제공
푸틴 “우크라이나 지원 국가 선박에도 대응”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국가 존망을 걸고 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무제한 드론 작전’으로 러시아 석유 인프라에 치명타를 입혀 큰 효과를 봤다. 이제 러시아의 해상교통로를 끊어 푸틴 정권을 흔들겠다는 각오로 덤벼들고 있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의 해상 드론 공격을 막지 못하면 경제가 무너진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다. 푸틴 대통령의 경고대로 러시아는 흑해뿐 아니라 힘닿는 곳 어디서든 서방 선박을 무차별 공격할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매듭짓기 위한 평화 협상이 평행선을 달리는 상황에서 흑해곡물협정 때처럼 양국의 자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선박 공격에 사용하는 공중 드론이나 수상 자폭 드론은 모두 시중 부품으로 손쉽게 제작할 수 있다. 양국의 해상 난타전이 계속되면서 그 노하우가 해외로 유출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무장단체 및 테러 조직이 드론으로 해상교통로를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질 위험도 있다. 앞서 소개한 세네갈 인근 해상에서의 유조선 피격 사건의 경우 현지 조달된 드론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해상 사보타주가 세계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해상 사보타주 목적의 드론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고, 민간 상선에도 드론 재머나 고출력 극초단파(HPM) 발생기 등 자체 방어 수단을 갖추도록 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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