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나를 잊지 않았다는 생각, 그 희망에 어르신들이 다시 살아요”

호용한 ‘어르신의안부를묻는우유배달’ 이사장, 6333가구 독거노인에 우유 배달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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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진 기자

    zzin@donga.com

    입력2025-12-13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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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용한 어르신의안부를묻는우유배달 이사장. 조영철 기자

    호용한 어르신의안부를묻는우유배달 이사장. 조영철 기자

    “쌀쌀해진 날씨에 배달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잘 먹고 건강히 살아서 우유를 연결해주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외롭게 가슴 아리고 사는데, 여러분이 곁에 계신다는 말씀에 용기가 나고 기쁩니다.”

    올가을 경기 성남 분당구에 사는 한 노인이 문 앞에 걸린 우유 주머니에 넣어둔 자필 편지다. 매일유업의 180㎖ 우유를 일주일에 3번 2팩씩 무료로 문 앞 우유 주머니에 넣어주는 사단법인 어르신의안부를묻는우유배달에 전하는 말이다.

    미수거된 우유 발견 즉시 안부 확인

    어르신의안부를묻는우유배달(이하 법인)은 10월 기준 전국 226개 시군구 가운데 73곳과 업무협약을 맺고 혼자 사는 6333가구에 우유를 배달하고 있다. 대상자는 주로 65세 이상 독거노인이지만 최근 50, 60대 남성의 고독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대상자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2024년 독거노인비율(65세 이상 1인 가구 수를 65세 이상 인구로 나눈 수치)은 22.1%로 10년째 증가하고 있으며, 2022년 기준 65세 이상 1인 가구의 71.8%가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2024년 고독사 수는 3924명으로 2017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다였고, 60대 남성이 1089명, 50대 남성이 1028명으로 가장 많았다.

    직전에 배달한 우유가 수거되지 않고 주머니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배달원이 매일유업 고객센터에 알린다. 고객센터는 배달 대상자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고객센터 연락도 받지 않는 사람의 명단은 법인으로 넘어온다. 법인은 한 번 더 통화를 시도한 후 받지 않으면 관공서에 연락해 공무원들이 대상자의 집을 직접 방문할 수 있게 한다. 이 모든 일이 하루 안에 이뤄진다.

    법인은 4월과 5월 서울 중구, 강원 원주에서 2명의 죽음을 72시간 내 발견해 시신이 방치되는 것을 막았다. 배송된 우유가 수거되지 않은 집을 방문했더니 대상자가 사망해 있었던 것이다. 홀로 생을 마감한 뒤 존엄하지 못한 모습으로 남겨질 것을 걱정하던 이들은 우유를 받으며 “내가 죽어 썩지 않고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줘 고맙소”라고 말한다.



    우유 배달을 통해 고립 상태로 사는 사람의 안부를 묻고 임종 후 몇 주, 몇 달이 지나서야 발견되지 않도록 하는 일. 이 복지 모델을 고안해낸 건 공무원이 아니다. 호용한 법인 이사장 겸 옥수중앙교회 목사(68)가 후원자들의 기부를 받아 2003년부터 100가구에 자발적으로 우유를 배달하면서 시작한 일이 여러 지방자치단체와 업무협약을 맺으며 확대됐다. 지자체로부터는 배달 대상자 추천 명단만 받을 뿐 그 어떤 자금도 지원받지 않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자국의 고독사 문제를 해소할 모범 사례로 법인의 활동을 보도하기도 했다.

    호용한 이사장을 12월 9일 법인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가 고안한 복지 모델이 국내외적으로 확산한 것에 대한 소회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우유 배달 대상자를 꾸준히 늘릴 수 있었던 건 어르신의 고립 문제를 함께 해결하겠다는 우리 사회의 의지가 있어 가능했던 결과예요. 저는 그저 작은 시작을 만들었을 뿐이고, 이 복지 모델을 키운 건 후원자, 배달원, 지자체입니다.”

    호 이사장이 처음 우유 배달을 시작한 것은 그저 달동네 어르신들이 우유를 마시고 골다공증이 나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다 2007년 무렵부터 고독사해 시신이 몇 달간 방치된 사건이 여럿 알려졌다. 호 이사장은 배달한 우유가 수거되지 않은 집을 잘 들여다보면 혼자 죽어가는 사람을 빨리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금의 시스템을 만들었다.

    법인 덕분에 목숨을 구한 사람들도 있다. 지난해 9월 부산 동래구에서는 법인과 함께 일하는 배달원이 우유가 수거되지 않은 집 문을 직접 두드렸다. 대상자가 힘겹게 문은 열었지만 건강이 매우 나쁜 상황이었다. 배달원은 직접 택시를 불렀고 대상자는 빠르게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아사히신문, 고독사 문제 해소 방안으로 보도

    호 이사장은 법인에서 월급을 받지 않는다. 그의 아내 역시 한 푼도 받지 않고 법인 직원으로 일한다. 그는 “우유 한 팩이 누군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느끼는 보람이 어떤 급여보다도 큰 힘이 된다”며 “어느 한 대상자가 ‘누군가가 곁에 있구나’라는 생각에 용기가 난다고 얘기했을 때 내가 정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호 이사장이 직접 우유 배달을 하면서 목격한 한국 사회 고립 문제의 본질은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관계적 빈곤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꾸준히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의 표정과 생활양식이 달라지는 모습을 호 이사장은 직접 경험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은 사회적 제도나 지원으로 어느 정도 해소가 가능하지만 관계가 끊긴 삶은 복원하기가 훨씬 어렵다”면서 “고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제적 혜택이 아니라, 상담 등 정서 지원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경에서는 능력에 따른 분배가 아닌, 필요에 따른 분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사회의 구조적 악, 한순간의 실수, 게으름 등 고립의 원인이 무엇이든 고립된 사람들이 지금 당장 가난한 것만은 사실이잖아요. 우유 배달로는 그들의 궁핍한 상황이 해결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군가는 나를 잊지 않았다는 생각이 정서적 치유를 가져오죠. 그 희망으로 사람들은 다시 살아요.” 

    임경진 기자

    임경진 기자

    안녕하세요. 임경진 기자입니다. 부지런히 듣고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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