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을 구경하고 나온 중국 유커들.[GAMMA]
중국 정부가 유커(遊客·단체관광객)를 이용해 21세기판 인해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유커의 규모와 씀씀이가 워낙 크다 보니 중국 정부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이들을 ‘무기’ 삼아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실제로 유커는 세계 관광·서비스산업의 최대 성장동력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다. 유엔 세계관광기구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인 해외관광객은 1억2350만 명, 이들이 쓴 돈은 2610억 달러(약 285조 원)를 기록했다. 전 세계 해외관광 지출의 21%나 된다.
유럽 관광도시, 유커 없이 지역경제 안 돌아가
유커가 집중적으로 방문하는 지역이나 국가는 경제활성화에 크게 도움이 된다. 아우베르투 아우베스 브라질 관광차관은 “유커의 대거 방문은 경제위기를 맞은 우리나라에게 축복”이라면서 “유커를 유치하고자 비자 없이 90일간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 아세안(ASEAN) 국가들은 관광 목적의 경우 별도의 비자 발급 없이 여권만으로 입국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와 상호 계약을 체결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탈리아 로마와 베네치아, 프랑스 파리 등 유럽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도 유커가 없으면 지역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가 됐다.중국 정부는 1983년부터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허용했다. 당시엔 홍콩과 마카오 같은 곳만 갈 수 있었다. 본격적인 해외여행은 2004년 시작됐다. 10년 만인 2014년 유커는 연간 1억 명을 돌파했으며 계속 늘어나고 있다. 탈립 리파이 세계관광기구 사무총장은 “중국 전체 인구를 감안할 때 유커 수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13억 중국인 가운데 여권 소지자가 6%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관광기구는 2020년이면 유커가 2억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고, 아시아개발은행(ADB)은 2030년 11억 명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 경제발전에 따라 유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소비도 크게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각국이 유커를 유치하려고 비자 면제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며 경쟁까지 벌이자 중국 정부는 유커를 ‘전략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자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거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국가에는 유커의 방문을 확대하는 반면, 자국과 맞서거나 관계가 나쁜 국가에는 유커의 방문을 막거나 축소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유커 수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은 관광산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국제여행사(CITS) 등 대표 여행사는 대부분 국유(국영)기업이다. 중국 관광산업을 총괄하는 국가여유국은 민간여행사의 영업 허가권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구두 지시만으로도 유커 모집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또 중국 국유기업들의 직원들은 공산당 지시에 따라 단체여행지를 정한다. 물론 중국 민간기업도 정부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일반 국민에 대한 중국 정부의 여권 발급도 상당히 까다롭다.
중국 정부가 유커 여행지로 대폭 권장하는 국가로는 필리핀이 대표적이다. 중국 정부는 1년 전까지만 해도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놓고 대립하던 필리핀을 상대로 바나나, 파인애플, 파파야 등 과일 수입제한 조치를 취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친중국 성향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취임한 후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자 중국 정부는 유커를 대거 보내는 등 선물 보따리를 안겼다. 10월 1~8일 중국 최대 연휴인 국경절에는 필리핀이 유커의 10대 인기 관광지에서 8위를 차지했다. 필리핀은 지난해에는 아예 순위에도 없었다.
러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올해 러시아를 방문한 유커는 지난해보다 2배 가까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러시아 공산혁명 100주년을 맞아 유커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고향 등 공산주의의 발자취를 좇는 ‘홍색(紅色)관광’에 대거 나섰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병합에 따른 서방의 제재조치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러시아는 유커 덕분에 주름살을 약간 폈다.
필리핀 · 러시아 웃고, 대만 · 한국 울고
2015년 중국 국경절 때 서울 명동 거리를 가득 메운 유커들.[동아DB]
중국 정부는 우리나라에도 3월부터 주한미군의 사드(THAAD ·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보복 조치로 자국민의 단체관광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유커는 지난 9개월간 전년 동기보다 월평균 36만 6000명씩 모두 329만4000명이나 줄었다. 우리나라 관광·숙박업계의 매출 타격은 이 기간 중 7조5000억 원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정부는 최근 우리나라와 관계 개선 합의로 단체관광을 일부 허용했다. 하지만 지극히 제한적이다. 단체관광 상품 판매 지역은 베이징과 산둥성으로 한정됐다. 중국 최대 온라인 여행사 트립닷컴(携程·옛 씨트립)을 비롯한 대형 온라인 여행사들은 모두 제외됐다. 또 사드 대지를 제공한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호텔과 롯데면세점 이용을 불허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는 이와 관련해 관광금지 조치 일부 해제에 생색을 내면서 ‘한국이 사드와 관련해 ‘3불(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유커가 한국을 외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중국 정부의 단체관광 일부 해제 의도는 우리 정부의 ‘3불 원칙’ 이행을 압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정부는 핵·미사일 개발을 계속하고 있는 북한의 경우에도 접경지역인 랴오닝성과 지린성에서 출발하는 관광만 허용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중국 정부의 이런 조치는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 따른 일종의 ‘생색내기’라고 볼 수 있다. 유커는 중국 정부가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가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