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지방분권개헌국민회의 주최 ‘지방분권개헌 서울회의 출범식 & 토크콘서트’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뉴스1]
헌법은 독립된 장으로 제8장 ‘지방자치’를 두었다. 문 대통령과 여당이 강조하는 ‘지방분권’과 ‘지방자치’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개헌한다고 할 때 종래의 지방자치와는 다른 표목을 걸어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지방자치는 헌정 사상 제1, 2공화국 때 잠시 시행되다 한동안 중단됐다. 그러다 1991년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 등 지방의회의원 선거, 95년 지방자치단체(지자체)장 선거가 실시되면서 형식적 틀을 갖췄다. 20년 넘게 지방자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역주민이 선출한 기관을 통해 지방자치행정의 민주성과 능률성을 제고하고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한다는 지방자치제도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해 사실상 껍데기 제도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이 때문에 최근 몇 년간 진행된 개헌 논의에서 지방자치에 관한 헌법 규정을 보완해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단골로 등장했다.
5월 대선에서도 각 후보는 하나같이 현행 지방자치제도의 허점을 지적하며 이를 내실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문 대통령도 당시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며 “지자체에 자치입법권, 자치행정권, 자치재정권, 자치복지권 등 4대 지방자치권을 보장해 수도권과 중앙정부에 초집중된 권한을 담대하게 지자체에 이양하기 위한 헌법적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지방분권은 지방자치를 좀 더 충실하게 구현하자는 염원을 담은 전략적 용어인 셈이다. 지방자치가 모범적으로 실현되는 형태가 바로 지방분권이다. 지방분권에서 더 나아가면 ‘연방제’ 주장으로 이어진다. 과거 이회창 후보의 대선공약에 등장했는데, 통일 후 한국을 염두에 둔다면 유럽 각국이나 미국처럼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과거 북한이 주장해온 ‘고려연방제’와는 다른 것이다.
지방분권론자들은 하나같이 지방분권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지자체의 재정자립도를 높여야 하며, 이를 위해 국세 비중은 줄이고 지방세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 대통령도 국세와 지방세 비율을 현행 8 대 2에서 7 대 3으로 조정하고 장기적으로는 6 대 4 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지방분권론이 가지는 중대한 함정이 있다. 지방세 비중을 늘려 지자체의 재정자립도만 높이면 지방분권으로 향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환상은 지극히 안이한 접근이다.
이렇게 지방분권이 실현될 경우 나타나는 현상을 개략적으로 보자.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터다. 광역시나 도시화된 인구밀집 지역은 그런 대로 지금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나 농산어촌 지역, 인구과소화 지역은 직격탄을 맞아 더욱 피폐해지고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곳으로 변해버린다. 결국 ‘내 삶을 바꾸는 지방분권’이 아니라 ‘내 삶을 망치는 지방분권’이 될 수도 있다. 왜 그럴까.
현재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기초자치단체의 재정운용 현황을 살펴보자. 기초자치단체의 기초자치세와 광역자치단체의 광역자치세는 지방세인데, 이런 지방세 수입을 바탕으로 한 수입이 또 있다. 시(구)세, 시(구)세외 수입, 도(특별시, 광역시)에서 받는 조정교부금, 도(특별시, 광역시)비 보조금이다. 그리고 국세 수입을 바탕으로 한 지방교부세, 국고보조금이 있다.
기초자치단체의 수입으로 시(구)세, 시(구)세외 수입이 전체 재정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재정자립도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서울의 소위 강남3구 같은 부자 기초자치단체는 엄청 높고, 광역시나 도시화 · 공업화된 인구밀집 지역은 상당하나, 대부분 지자체는 아주 낮다.
예를 들어 경북 23개 시군 가운데 10개 시를 제외한 13개 군에서 대구광역시의 베드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칠곡군을 뺀 12개 군의 재정자립도는 10% 미만이다. 관내 공무원 월급도 충당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부족분은 대부분 국가가 국세로 거둬 배분하는 지방교부세와 국고보조금, 도(특별시, 광역시)로부터 받는 조정교부금과 보조금에 의존해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분권론자들의 주장처럼 국세를 줄이고 지방세를 늘리는 식으로 조정하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농산어촌 지역은 경제적 기반이 워낙 약해 국세 일부를 지방세로 돌린다 해도 추가로 거둘 수 있는 지방세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다. 반면 국세가 현격하게 줄어드니 종래처럼 국세 수입에서 지방교부세 등으로 배정받는 금액은 더욱 큰 폭으로 낮아질 것이다. 그 지역은 가용 수입의 큰 감소라는 직격탄을 맞게 된다.
부유한 강남3구 주민이든, 종일 파도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경북 영덕군 해안가 주민이든 우리 헌법상 똑같이 존엄한 인격의 주체이자 행복추구권이 보장되는 국민이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강남3구 주민이 잘사는 것은 그들의 노력이나 뛰어난 자질에도 연유하겠으나, 상당 부분 다른 지역 주민들의 기여가 보태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평등의 원칙이 존재하고, 온 국민이 이에 기초해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뼛속 깊이 새기지 않는다면 우리 공동체는 존립의 정당한 근거를 잃게 된다.
따라서 지방분권을 위해서는 국가 조세체계 전반에 걸쳐 전면적인 개혁이 먼저 필요하다. 지방세가 전부 지자체에 귀속되도록 한 것부터 고쳐야 한다. 가령 지방세 수입의 3분의 1은 그 지자체에 배당하되 나머지는 가칭 ‘지방세평형기금’이란 곳에 넣어 이를 전국 주민 수대로 평등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이는 낙후 지역 주민들이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조세수입의 평등 배분 원리를 받아들이는 세제개혁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지방분권에 관한 여러 세미나와 학술회의에 참석해 이 같은 의견을 개진했다. 그럼에도 아직 어떠한 세제개혁의 구체안도 나오지 않고 있다. 그냥 지방분권을 하자는 주장만 나부낀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대단히 무책임하고 위험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지방자치를 강화하려 한다면, 무지갯빛 환상만 제시하는 지방분권론에서 현실에 발을 디딘 좀 더 실질적인 논의로 하루빨리 나아가야 한다. 세제개혁 없는 지방분권은 국가적 재앙으로 연결될 개연성이 농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