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법관 임명식’에서 가족이 신임법관에게 법복을 입혀주고 있다. [뉴시스]
저자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국회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법률을 제정하기가 너무 어려워 ‘식물국회’가 된 듯하다. 반면 사법부는 1971년 1차 사법파동 이후 끊임없이 ‘독립된 사법부’를 주장하며 그 권한을 확대해왔다.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는 국회를 통해 제정된 법률보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의해 훨씬 빠르게 판가름 난다.
대법원은 일사불란한 의사결정의 조직체고, 지금까지 그 권한의 외연이 꾸준히 확장돼왔다. 이 과정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청와대와 ‘직거래’하며 상고법원 등을 받아내려 했다. 그는 국민에 대해 ‘자신들의 사건은 대법원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이기적 존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대법원의 이 같은 태도는 양 전 대법원장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과거 대법원의 운영 형태를 그대로 답습했을 뿐이다.
구성원인 판사들 중 상당수도 국민을 주권자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외부 입김이 차단된 조직체에서 타성에 따라 사건을 처리한다. 사법부건 판사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법정에서 위세를 부리거나, 사건 당사자로 인해 마치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는 양 짜증을 내는 등의 행동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판사들이 매너리즘에 빠졌기 때문이다.
판사들끼리 흔히 “요즘 A변호사 형편이 괜찮은가 몰라” “수임이 제법 늘었다던데”라는 대화를 한다. 얼마 전까지 동료 판사였던 A변호사가 사건을 많이 맡기를 바라는 심리인데, 이는 전관예우로 이어지기 쉽다. A변호사가 대리하는 사람은 판사가 호의를 보이는 ‘A변호사의 종속변수’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대법관에 따라 사건의 80% 이상이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돼버리고, 그나마 이유를 다는 판결에서도 당사자의 절규로 채워진 쟁점 판단을 생략하는 것은 사건 관련자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사법부 독립은 ‘공정한 재판’을 실현하는 도구로 쓰일 때만 의미가 있다. 사법부 권한 확대를 위한 수단이거나 매너리즘에 빠진 판사의 일탈 행위를 정당화하는 가림막이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