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1부는 양승태 사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을 놓고 거래를 시도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외교부를 압수수색했다. [동아일보 전영한 기자, shutterstock]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돼 있다. 수십 년간 법원과 사법부는 이 조항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자신들의 권한 확대를 꾀해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사법부는 그들만의 철옹성을 쌓았다. ‘사법독재’ 한탄이 간간이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 조문에는 ‘양심’이란 단어가 포함돼 있다. 심판의 준거로 ‘독립하여’ 외에 중첩적으로 ‘양심’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다. 이는 객관적 양심설과 주관적 양심설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한국 헌법학자들은 그중 객관적 양심설을 취한다. 헌법 제103조가 말하는 양심은 ‘법조적 · 객관적 · 논리적’ 양심이다.
말은 그럴싸하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양심이면 양심이지, 무슨 법조적 · 객관적 · 논리적 양심이 따로 있단 말인가.
객관적 양심설에 따르면 어느 법관이 사형폐지론에 대한 신념과 양심을 갖고 있다 해도 법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 이에 반해 주관적 양심설은 헌법 제103조의 양심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양심과 같은 의미라고 본다. 그러나 사형폐지론자인 법관이라도 당연히 ‘법률에 따른’ 재판을 해야 하므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부담을 갖게 된다.
우리와 비슷한 헌법 조문을 가진 일본도 객관적 양심설이 통설이고 판례인 듯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오류다. 일본에서 한국식의 난해한 개념인 객관적 양심설을 취하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또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례를 살펴보면 명백히 주관적 양심설을 취하고 있다. 독일은 우리와 조문이 달라 ‘양심’이라는 단어 자체가 들어 있지 않다.
객관적 양심설을 취할 때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판사가 부당한 청탁을 받았거나 부당한 목적을 가지고 재판하는 경우에도 이를 모호한 ‘양심’의 범주에 넣어버릴 염려가 있다는 점이다. 이번 사법농단 사태에 관련됐을 많은 법관이 양심의 가책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에서 보듯이 말이다.
법관의 양심이라고 일반인의 양심과 다르지 않다. 다를 수 없다. 이들도 법복을 벗으면 아이의 부모이자, 한 사람의 배우자가 된다. 헌법 제103조는 인간 보편성으로서 양심, 어쩌면 이를 명기함으로써 좀 더 엄격한 양심을 법관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사법농단 사태에 애써 침묵하는 것은 법관의 양심에 어긋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