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전영한 기자]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사진)은 8월 23일 “북한이 경제개발과 체제 보장 차원에서 비핵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 · 21세기평화연구소(이사장 남시욱)가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개최한 제14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 강연에서다. 이 전 장관은 “종전선언으로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 종전선언은 경제제재 해제와 상관없기 때문에 너무 심각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도 말했다. 다음은 이 전 장관이 한 강연의 주요 내용이다.
선대의 생존 노선 바꾸려는 김정은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는 우리 모두의 관심 사항이다. 올해만큼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진 때도 없었다. 실패할 수 있지만 노력에 따라선 좋은 결과를 맺을 가능성도 높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한반도의 대결구도를 해결하려면 기본적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한다. 또 남북한과 북·미 사이의 구조적인 적대관계를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4·27 판문점선언과 6·12 북·미 정상회담은 그런 적대관계를 없애고 새로운 길을 여는 데 합의한 것이다.둘째, 지금까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한 장본인은 북한 지도자였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에 이어 위협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회담에 나온 것은 스스로의 능동적 결단에 의해서다. 그가 먼저 대화 중에는 핵실험과 전략적 도발을 안 할 수 있다고 했고, 한미군사훈련을 통상적 수준으로 이해하겠다고도 했다.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도 자발적으로 했다.
사람들은 김 위원장이 회담에 나온 이유가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와 압박을 못 견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몇 차례 방북과 김 위원장과 면담, 김영철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의 방미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면담을 거치면서 김 위원장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바뀌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만약 미국이 압박과 제재를 계속한다면, 어렵겠지만 지금 이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 반면 경제제재를 해제해준다면 우리는 중국이나 베트남보다 더 성장할 수 있고, 이것이 내 꿈이다. 그래서 비핵화를 하려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북한이 생존의 판을 바꾸겠다고 타진하니까 트럼프 대통령이 진지하게 생각한 것 같다.
김 위원장 나름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조건부이지만 핵을 포기하고 경제를 선택한다는 것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60여 년간 이끌었던 북한의 생존 노선을 바꾸는 것이다. 본인이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북한에 자본주의가 들어온다는 것은 (북한으로선) 살이 떨리는 일이다. 이는 북한이 백년 숙적이라고 칭하는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김 위원장은 능동적으로 정세를 발전시켰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싶어 한다. 그는 ‘내가 비핵화라는 큰 조치를 하면 트럼프 너도 큰 움직임을 보여서 선의가 선의의 조치를 낳는 선순환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간단치 않다. 삐거덕거리는 측면이 있다.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 간 갈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편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급한 것 같지만 엄밀하게 상황을 살펴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얻은 건 꽤 되는데 김 위원장이 얻은 것은 별로 없다. 핵심은 대북제재 해제에 김 위원장이 매달린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현실주의적이고, 과제를 점검하는 리더십으로 민생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내년이면 뭔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고 외부 투자를 받아야 하기에 비핵화를 마냥 끌 수만은 없다.
북한과 미국의 비핵화 협상은 현재 교착상태다. 결론부터 말하면 교착상태가 길어지는 것을 북·미 양쪽 모두 원치 않는다. 종전선언은 대북제재를 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게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이다. 종전선언에 필요한 조건이 있다. 한반도에서 대결구조가 계속되거나 대결구조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함께 이뤄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장성급회담에서 조치가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일종의 합의로 나올 가능성이 있는데, 종전선언을 뒷받침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종전선언은 국제적으론 전쟁을 끝내는 개념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합의한 개념은 조금 다르다. 정전협정 체결 후 사실상 전쟁이 중단된 한반도 정세의 특징 때문이다. 한반도 구성원과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알려 심리적 안도감을 주자는 게 종전선언 취지다.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구축 필요
[동아일보 전영한 기자]
지금 비핵화 협상의 대화국면이 쉽게 깨지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의 인내력 한계와 북한의 고질적인 뻗대기 등 불안정한 요소도 많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김 위원장은 판이 깨지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4월 ‘경제 올 인’으로 국가대전략을 바꿨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미군 유해송환 등을 꾸역꾸역 하고 있는 이유다. 안타까운 것은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의 협력이 필요한데, 지금은 갈등구조다. 김 위원장에게는 시간이 없다. 북한은 2020년까지 경제발전 계획을 세워놓았다. 그 전에 경제제재가 어느 정도 해제돼야만 외국인 투자가 들어올 수 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은 골치 아픈 존재다. 하지만 북한이 가진 자원이 우리의 자본·기술과 결합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동안 김 위원장은 그 나름 경제를 개방해왔다. 우리가 북한의 핵·미사일에 몰두하다 보니 경제는 잘 안 보였지만 상당 부분 개방해놓았다. 김정일 시대에 경제특구가 4개밖에 없었던 반면, 김 위원장은 22개의 경제특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제재 속에서는 어느 누구도 투자를 하지 않는다. 북한도 경제제재 해제만이 살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는 누구도 한반도에 핵을 들여올 수도,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남한에는 핵이 없지만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면서 주한미군이 핵 전략자산을 한반도에 전개한다면 북한이 자신들만 비핵화를 하겠는가.
한편 6자회담국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북한은 남북미 3자만으로는 종전선언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려면 다자안보를 통해 협력을 구축해가야 한다. 또 통일은 다음 세대가 이루더라도 북한의 경제개발과 연계한 남북한 경제공동체라도 형성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