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된 파울루 벤투 전 충칭 당다이 리판 감독. [동아DB]
벤투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도 있다. 그는 2002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월드컵 당시 포르투갈 선수로 뛰었다. 이영표가 크로스해준 공을 박지성이 가슴으로 받아 차 넣었던 그 경기다. 루이스 피구와 세르지우 콘세이상 등 황금 세대가 이끈 포르투갈을 1-0으로 제압한 그날, 한국은 사상 최초로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당시 경기에 나왔던 벤투를 한국 팬들은 뚜렷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왜 범장 벤투를 불렀나
김판곤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이 기자회견장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동아DB]
이 사실이 보도된 직후 축구협회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간 “추측성 보도를 자제해달라”며 소극적으로 당부하던 것과는 판이했다. 축구협회는 보도 1시간여 뒤 “8월 17일 김판곤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회 위원장이 취재진 앞에서 직접 감독 선임 소식 및 과정을 브리핑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예측에서 벗어난 제3인물. 축구팬 여론이 좋았을 리 없다. 축구협회를 향한 불신은 다시 치솟았다.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FIFA 랭킹 1위 독일을 꺾는 기적이 없었다면 축구협회 수뇌부의 향후 거취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를 인지한 김판곤 위원장은 7월 5일 월드컵 후 첫 공식석상에서 “터무니없는 감독은 안 데려온다. 여러분이 지지해달라”고 발언했다.
김 위원장은 새로운 감독의 조건들을 제시했다. 구미가 당겼다. 다만 조건을 하나씩 들을 때마다 우려도 생겼다. ‘이런 감독을 데려오기가 분명 쉽지 않을 텐데,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김 위원장이 수면 위로 꺼낸 기준은 △월드컵 예선을 통과한 지도자 △빅리그를 경험한 지도자 △리그 및 대륙별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지도자 등이었다.
8월 17일 기자회견장에 등장한 김 위원장은 벤투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7월 5일 이후 40여 일 만이었다. 그는 모두 발언으로 그간의 과정을 알렸다. 이어 끝장 토론이라도 하듯 1시간 넘게 그와 취재진들의 열띤 문답이 이어졌다. 최종 후보군 3명까지 추린 이야기, 가장 인기가 높았던 플로레스와 접촉한 이야기, 벤투 감독이 중국 슈퍼리그 충칭 당다이 리판에서 나오리란 첩보를 입수한 이야기, 벤투 감독을 한국으로 데려오겠다고 결심한 이야기, 선임 기준을 너무 높게 설정해 힘겨웠다는 이야기 등 내막이 드러났다.
김 위원장의 답변은 고민의 시작점을 바꿔놓았다. 우리는 그간 ‘어떤 감독을 데려와야 하느냐’에 갇혀 있었다. 네덜란드 대표팀과 레알 마드리드 등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처럼 또 다른 세계적 명장이 가져다줄 선물에 사로잡혀 있었다. 월드컵 우승을 달성한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 전 브라질 대표팀 감독 등의 이름에 흥분하기도 했다. 이름 있는 감독이 오면 2002 한일월드컵 영광을 재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기대에 꽉 차 있었다.
아무도 맡고 싶지 않은 한국 축구
그런데 틀렸다. 우리 스스로 먼저 질문을 던져야 했다. ‘기대하는 만큼의 감독을 데려올 준비가 돼 있는가.’ 좀 더 노골적으로 ‘축구 변방 동아시아까지 날아와 고생을 자처할 만큼 한국 축구가 매력적인가’부터 따져야 했다. 김 위원장은 “감독 후보군의 진정성”이란 표현을 여러 번 썼다. 이를테면 일부 감독은 한국 축구를 잘 알지도 못한 채 “돈을 얼마나 줄 건데”라는 물음만 던져왔다. 고자세로 일관한 상대 감독들이 제시하는 상상 이상의 조건에 돌아섰다는 후문이다. 한국 팬들이 첫 번째 선택지로 원했던 플로레스 감독은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기가 어렵다. 또 한국 축구는 손흥민 정도밖에 모른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이 직접 감독 자택까지 찾아가 얻어낸 답이 그랬다.한국은 월드컵에 9회 연속 진출했다.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는 대기록이다. 다만 브라질월드컵, 러시아월드컵 모두 간신히 막차를 탔다. 러시아월드컵에 참가한 32개국 중 20위권 후반대의 평가를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감독 후보군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대륙별 대회인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우승도 1960년이 마지막이니 ‘아시아의 호랑이’란 표현도 사실 웃긴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지도자에게 거액을 투자하는 것도 아니면서 눈높이만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벤투 감독이 손을 맞잡았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유로 4강을 합작해낸 뒤로는 조금 아쉬웠던 행보. 이 명예를 되찾으려는 동기가 있다. “파주NFC(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에 우리 코칭스태프 사무실을 마련해달라” “훈련 시 드론을 띄워 촬영할 수 있는지 등도 확인해달라”는 새 감독의 적극적인 자세에 김 위원장도 반색했다.
첫발은 잘 떼지 않았나 싶다. 벤투 감독 선임에 대한 비판 여론을 에둘러 피하지 않고 “나 역시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벤투 감독의 경기와 훈련법을 모두 봤다. 인내를 갖고 평가해달라”는 메시지를 덧붙였다. 이번 회견은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선수단, 축구협회, 그리고 팬들이 소통하며 신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김 위원장이 공개한 상세한 과정은 상당히 많은 것을 가져다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