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표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1928~2018)의 말이다. 정말 그렇다. 많은 사람이 그의 ‘러브(LOVE)’를 안다. 상단에 L과 비스듬한 O를, 하단에 V와 E를 배치한 단순하면서도 경쾌한 작품. 뉴욕 맨해튼의 ‘러브’ 조형물은 뉴욕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일부러 찾아가지 않더라도 우연히 마주치기 마련이다. 센트럴파크와 뉴욕 현대미술관(MoMA) 사이 6번가에 놓인 이 빨갛고 파란 ‘러브’ 앞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진 찍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사랑. 반짝이는 뉴욕에도, 여행의 설렘에도, 함께 길을 나선 동반자에게도 어울리는 단어가 이것 말고 또 있을까.
서울 명동 삼일대로에 자리한 ‘LOVE’. 366×366×183cm, 1966~2016. [지호영 기자]
앤디 워홀(왼쪽)과 로버트 인디애나. [KIWI Arts Group]
인디애나의 ‘러브’ 이미지를 사용한 미국 우표. 1973년 발행됐다. [위키피디아]
미국 뉴욕 맨해튼 6번가에 세워진 ‘LOVE’. [위키피디아]
‘LOVE’와 같은 양식의 ‘HOPE’는 로버트 인디애나가 2008년 버락 오바마 대선 캠페인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뉴욕 맨해튼에 설치된 ‘HOPE’. [flickr@Shutter Runner]
“아주 화근이 되는 위험한 물건”
로버트 인디애나의 회화 작품들. US 66 (STATE) · 2002, THE AMERICAN DREAM · 1961, FOUR DIAMOND PING · 2003(왼쪽부터) [ⓒ2018 MORGAN ART FOUNDATION]
연면적 1만㎡ 이상인 건축물을 신축하거나 증축할 경우 건축 비용의 일부를 미술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에 따른 건축물미술작품제도다. 공공미술통계(www.publicart.or.kr)에 따르면 2018년 8월 현재 전국에 1만7224개 건축물 미술작품이 설치돼 있다. 작품 평균가는 1억1540만 원. 3억 원 이상 작품은 345개로 2%에 불과하다.
대신증권은 명동에 새 사옥을 건축하면서 ‘러브’ 조형물을 구매해 건물 외부에 설치했다. 그러나 이는 건축물미술작품제도 때문은 아니다. 대신증권은 ‘마망(Maman)’이라는 거대한 거미 조각 작품으로 유명한 루이즈 부르주아의 ‘아이벤치’(Eye Bench, 1996~97)를 보유한다. 김병종 화백의 회화 작품 ‘카리브·어락Ⅱ’(2008)도 여의도 사옥에서 명동 대신파이낸스센터로 옮겨왔다. 대신증권에 따르면 이 두 작품만으로도 법이 정한 건축물미술작품 구매 한도를 채운다고 한다.
그럼에도 대신증권은 인디애나의 ‘러브’를 구매했다. ‘러브’ 프로젝트를 주도한 대신증권 브랜드전략실의 김봉찬 이사는 “예술작품은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된다”며 “명동은 한류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고 명동성당이 자리한 지역이기에, 작품이 가진 ‘사랑’이란 메시지가 명동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또 세계 주요 도시마다 세워진 ‘러브’를 서울에서도 볼 수 있길 바랐다”고 ‘러브’를 택한 배경을 설명했다. 김 이사는 ‘러브’의 도시, 뉴욕 출신이기도 하다. 미술대학인 프래트(Pratt)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하고 뉴욕에서 브랜드 디자이너로 활동한 그는 “인디애나도 나와 같은 그래픽디자이너 출신”이라며 “아트와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을 개인적으로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로버트 인디애나. 그는 ‘러브’로 유명해졌지만, ‘러브’ 때문에 조롱받다 오랜 기간 잊힌 불운한 팝아티스트다. MoMA가 소장한 350점의 대표 작품을 꼽은 책 ‘MoMA Highlights’(2004)에도 그의 작품은 단 한 점도 들지 못했다. 인디애나는 1960년대 뉴욕에서 동갑내기 앤디 워홀과 함께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영광은 워홀의 몫이었고, 인디애나에게는 ‘상업적 그래픽디자이너’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러브’의 대성공 이후 ‘뉴욕타임스’의 미술비평가 존 캐너데이가 “인디애나 다음 작품의 제목은 ‘돈(Money)’이 돼야 마땅하다”고 했을 정도다. 인디애나는 언론 인터뷰에서 “ ‘러브’를 통해 뭘 배웠냐고? 아주 화근이 되는 위험한 물건이란 거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앤디 워홀, 로이 릭턴스타인 등 1960년대 뉴욕 팝아티스트들이 깡통수프나 광고 이미지 등 상업적 제품을 소재로 삼았다면, 인디애나는 숫자와 단어 등을 소재로 삼았다. ‘러브’ 이전에 숫자와 ‘EAT’ ‘DIE’ 등 단어로 그림을 그리고 조각품을 만들었다. 그의 ‘러브’는 1964년 MoMA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크리스마스카드로 처음 선보였다. 어릴 적 교회에서 늘 보던 ‘God is Love’ 사인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이 이미지는 1960년대 반전운동을 펼치던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랑을 하자, 전쟁이 아닌(Make Love, not War)’이란 메시지로 읽히며 큰 인기를 끌었다. ‘러브’ 이미지는 티셔츠, 컵, 엽서 등에 무단 사용됐고, 1973년 미국 우표로 제작되기까지 했다. 러브가 누구나 사용하는 단어라 저작권 등록에 실패해 인디애나는 이 같은 대성공에도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었다. “대중 취향에만 입맛을 맞춘 상업적 작가”란 악평만 얻었을 뿐. 인디애나는 1978년 뉴욕을 떠났다. 뉴욕에서 650여km 떨어진 메인주 바이널헤이븐섬으로 옮겨간 그는 올해 5월 세상을 뜰 때까지 섬을 떠나지 않았다.
최고 경매가 56억 원
루이스 부르주아, Eye Bench, 1996~97 [지호영 기자]
김병종, ‘카리브 · 어락Ⅱ’, 2008 [지호영 기자]
대신증권 여의도 사옥에 있었던 ‘황소’상. 김행신 전 전남대 교수 작품이다. [사진 제공 · 대신증권]
3월 대신파이낸스센터 6층 ‘갤러리343’에서 열린 구본창 작가의 흑백 사진전 ‘감춰진 얼굴’ 전시. [사진 제공 · 대신증권]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인디애나의 ‘러브’는 대중친화력이 매우 높은 작품이기에 기업이 이 작품을 통해 문화예술을 사회와 향유하고자 했다는 점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김순응 김순응아트컴퍼니 대표는 “기업이 훌륭한 예술작품을 소장해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기업의 브랜드 가치 제고에도 큰 도움이 되며, 인디애나 작품은 앞으로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산 투자 측면에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말했다.
대신파이낸스센터에는 ‘러브’ 외에도 감상할 만한 예술작품이 더 있다. 1층 로비에는 부르주아의 ‘아이벤치’와 김병종의 대형 회화 ‘카리브·어락Ⅱ’가 설치돼 있다. 이 빌딩 6층에는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주말에도 문을 여는 작은 화랑 ‘갤러리343’도 있다. 여의도 증권가의 명물로 통하던 대신증권의 ‘황소’상은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대신증권 연수원으로 일단 옮겨졌다. ‘러브’ 주변으로 공원 조성이 마무리되면 이곳으로 다시 옮겨올 계획이다.
“뉴욕 등 세계 주요 도시에는 길거리나 공원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 많다. 서울에서는 그러한 기회가 적은 것이 항상 안타까웠다. 서울이 예술도 충만한 도시로 변화하는 데 명동의 ‘러브’가 작은 기여를 하길 희망한다.” 김봉찬 이사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