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에서 콩나물 살 때는 몇백 원을 깎고자 애쓰지만, 백화점 명품관에선 정가대로 구매한다.
# 노후준비가 중요하다고 여기면서도 생활비가 급하면 퇴직금을 중간정산해 쓴다.
![최후 안전판 퇴직연금, 행동경제학에 길을 묻다](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11/08/01/201108010500012_1.jpg)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금융회사들은 서로 자사의 상품이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며 세일즈에 나선다. 한 증권사 상품설명회.
한국도 최근 퇴직연금제도의 기반이 되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개정해 행동경제학자의 의견을 대폭 수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퇴직연금제도의 ‘디폴트 옵션(Default Option)’에 변화를 준 것이다. 디폴트 옵션이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특정 사항이 선택되는 것을 말한다.
먼저 근로소득세와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는 납세자의 심정을 비교해보자. 연말이 되면 근로자는 소득공제를 받고자 각종 영수증을 챙기고 서류를 떼느라 바쁘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세금을 일부 돌려받으면 공돈이 생긴 것처럼 기뻐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연말정산이란 매달 월급을 받을 때 세금으로 낸 돈 가운데 일부를 돌려받는 것으로, 공돈이 아닌 자기 돈이기 때문에 기뻐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자를 받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해야 한다. 그러나 부동산을 보유하는 기간에 발생한 자본차익에 부과되는 양도소득세의 경우는 상황이 반대다. 부동산을 매각할 때 받은 돈이 먼저 양도자의 주머니에 들어간 다음 세금을 내는 터라 아까운 생각이 든다. 먼저 세금을 내고 돌려받느냐, 아니면 먼저 돈을 받은 다음 세금을 내느냐에 따라 납세자 기분이 엇갈리는 것이다.
![최후 안전판 퇴직연금, 행동경제학에 길을 묻다](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11/08/01/201108010500012_2.jpg)
이번 개정안에서는 퇴직금 중간정산을 엄격히 제한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현행 법 하에서는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사업장 근로자는 퇴직금 중간정산이 가능한 데 반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사업장 근로자는 주택 구입처럼 대통령이 정하는 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면 퇴직금을 중간정산할 수 없다. 이러한 차이는 기업과 근로자가 퇴직연금제도를 신규로 도입하는 데 장애로 작용했다. 대부분 기업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기에 앞서 퇴직금 중간정산부터 하는 것이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조사에서는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중간정산을 받은 근로자 비율이 6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연금제도가 근로자의 노후소득 보장을 위해 도입된 것임에도 제도 도입이 빌미가 돼 퇴직금 중간정산이 이뤄지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년 개정안이 시행되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사업장이라도 중간정산 요건이 엄격해진다. 그럼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중간정산으로 근로자의 노후생활비 재원인 퇴직금이 사라지는 일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은 또한 신설 사업장은 퇴직연금제도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규정했다. 지금까지는 퇴직금제도가 기본값으로 설정된 상태에서 회사와 근로자가 원할 경우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개정안 시행 이후에는 신설 사업장의 경우 1년 이내에 퇴직연금제도를 의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퇴직연금이 기본값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디폴트 옵션 변화가 제대로 자리 잡으면, 은퇴자금을 모으겠다는 굳은 결심이 없더라도 누구나 적지 않은 노후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넛지’라는 책으로 유명한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 교수의 실험을 살펴보면, 1990년 퇴직연금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디폴트 옵션 몇 가지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근로자 중 절반의 평균 저축금액이 2년 만에 소득의 3.5%에서 11.5%로 늘었다.
![최후 안전판 퇴직연금, 행동경제학에 길을 묻다](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11/08/01/201108010500012_3.jpg)
*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으로 일반인과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은퇴교육과 퇴직연금 투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