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가 그린 11월 달력. 본인이 춤에 관심 있으면 처마에 매달린 곶감조차 춤추는 듯 보인다.
사람도 넓게 보면 자연의 하나. 우리 부부는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지내는 편이다. 농사일도 손님맞이도 산책도 대부분 함께한다. 심지어 먼 길 나서는 강의도 함께 갈 때가 많다. 이렇게 늘 붙어 있지만 한 남자는 한 여자를 평생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를 방어적으로 보지 말고 적극 살려내면 어떨까. 부부 사이의 설렘은 일상을 다르게 보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즉 부부가 서로 이해가 안 돼 싸울 에너지가 있다면 이를 반대로 살려, 상대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으로 바꿔보자는 거다. 이렇게 해서 내가 내린 결론이 ‘부부연애’다. 부부가 다시 연애를 하자는 거다. 올 초 ‘피어라, 남자’라는 책을 낸 뒤 명함을 새로 만들고 거기에다 ‘부부연애 전도사’라고 거창하게 새겼다.
한 해를 돌아보면 명함만큼 제대로 ‘전도(傳道)’를 못한 거 같다. 아직 우리 부부의 연애 수준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럼 이번 겨울은 어떻게 발전할까. 지금 생각은 춤이다. 막춤이 아닌 나름 틀이 있다는 탱고를 아내와 추는 거다. 여름까지만 해도 내가 탱고를 추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니, 부부연애란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가 보다.
얼마 전부터 큰애가 탱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웃 중 탱고를 가르칠 만한 사람이 있어 일주일에 한 번꼴로 배운다. 탱고는 둘이서 추는 춤. 딸은 집에서 함께 연습할 파트너가 필요했고, 처음에는 아내가 탱고에 관심 있어 파트너가 되곤 했다. 그렇게 둘이서 하는 걸 지켜보니 나도 구미가 당겼다. 게다가 탱고는 기본이 남녀가 함께 추는 춤이라니, 갑자기 집안 남자로서 내 존재감이 한결 커진 듯했다.
딸과 몇 번 춰보니 탱고가 점점 빠져들게 하는 무엇이 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로서 다 큰 딸과 탱고를 추는 맛! 그러다 자연스럽게 아내와 추게 됐다. 아내는 오랜 세월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와서인지 편하다. 새로운 탱고 동작은 딸한테, 또는 동영상을 보며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아내와 주로 춘다. 이제 시작이라 둘 다 서툴고 ‘버벅’대지만 서로의 몸짓을 탐색하는 연인처럼 탱고를 추는 맛이 좋다. 탱고복이나 신발도 없이 근사한 플로어가 아닌 안방이나 거실에서지만. 심지어 김치를 담그다가도 잠깐 몸을 풀 겸 춘다. 한마디로 우리 식 제멋대로 탱고다.
각자 중심, 둘의 중심, 흐르는 중심
탱고에서 남자는 춤을 이끈다 해서 ‘탕게로(Tanguero)’, 여자는 남자 리드를 따르면서 자기만의 멋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탕게라(Tanguera)’라 한단다. ‘내가 아내를 리드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마치 연애를 다시 하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지 않나. 누군가를 리드한다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먼저 자신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한다. 스스로 중심이 안 서면 남을 이끌 수 없다. 또한 한 번의 중심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삶이란 흐르는 것이기에 늘 중심도 ‘흐르는 중심’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탕게로는 탕게라의 중심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참된 리드가 된다. 이게 잘 안 되다 보면 발을 밟기도 비틀거리기도 하며, 몸도 느낌도 다 엉킨다. 우리네 삶도 넓게 보면 탱고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가슴은 하나에 다리가 넷인 춤
보통 때는 중심을 못 잡고 헤매다가 가끔 서로의 중심이 맞아 잘 흘러갈 때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이를 ‘탱고, 강렬하고 아름다운 매혹의 춤’이라는 책을 지은 배수경은 “가슴은 하나에 다리가 넷인 춤”이라고 묘사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지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둘 사이 마음이 제대로 흘러야 일심(一心)이 되며, 그렇게 되면 배우자가 어떤 행동을 해도 사랑스럽다. 탱고는 이런 맛을 극대화하는 것 같다. 두 다리로 걷다가 네 다리로 걷는 맛! 황홀감이 배가된다.
탱고는 음악과도 밀착된다. 탱고 음악은 보통 3분이다. 세 곡쯤 추더라도 10분 정도. 초보인 나로서는 한 곡 추기도 벅차다. 틈틈이 동작을 배우고 연구한다. 영화 ‘여인의 향기’를 보면 주인공 알파치노가 젊은 아가씨와 탱고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노년에 그 정도 춤으로 파트너를 리드할 수만 있다면…. 쉽게 나이들 것 같지는 않다.
그러고도 더 욕심이 난다. 탱고는 남녀만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추는 춤이기도 하단다. 어느 날 큰애가 그런다.
“아빠, 이다음에 내가 딸 낳으면 그애랑 탱고 춰줄 거지요?”
탱고는 ‘둘이서 함께 걷는 춤’이란 말도 있다. 내가 조그마한 손녀의 손을 잡고 가슴을 마주해 음악에 맞춰 한 걸음씩 걷는다면, 이 또한 춤이 될 수 있으리라. 정말 꿈같은 그림이 아닌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이좋게 탱고를 추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만 있어도 얼마나 좋으랴.
아무리 난방이 잘 된 집이어도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면 찬바람이 인다. 방을 데우는 에너지야 얼마나 들겠나. 하지만 부부 사이, 몸과 마음이 어긋나서 일어나는 찬바람은 아무리 돈을 들여도 쉽게 가시지 않는다. 부부연애는 총각 때와 달리 돈 들 일도 거의 없고, 장소와 시간의 구애도 크게 받지 않는다. 추운 겨울을 따스하게 나는 데 부부연애만 한 게 있을까.
1 짝짓기하는 실잠자리. 작은 곤충에게서도 남녀가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2 암탉과 수탉이 다정히 있다. 3 도라지 두 뿌리가 엉킨 것이, 마치 탱고를 추는 듯 황홀하다. 4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탱고 추는 장면. 5 부부가 탱고를 추는 데는 안방이든 거실이든, 옷이나 신발 등 무엇에든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