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난 냉이 한 포기. 잎보다 뿌리가 훨씬 많고도 길다.
달력에 따르면 새해는 1월1일, 봄은 3월1일이 기준이다. 그러나 생명을 기준으로 하면 새해는 입춘(立春)이 된다. 입춘은 24절기 가운데 첫째다. 달력에 따른 봄은 아직 멀었지만 그전에 봄은 일어선다. 다가오는 봄을 미리 생각한다면 솔직히 또 힘들게 일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지 않다. 겨우내 느긋하게 지내던 습성이 남아 그냥 그대로 머무르고 싶다. 하지만 철 따라 몸이 먼저 바뀌는 걸.
모양도 울림도 제각각으로 일어서는 봄
봄이 일어서는 조짐은 여러 가지다. 그 모양새도 울림도 제각각이다. 첫 조짐은 생명의 근원인 햇살. 아침마다 집안 깊숙이 들어오던 햇살 길이가 점차 짧아진다. 입춘 햇살은 등으로 받고 있으면 더없이 좋은 자연 난로다. 어머니가 자식을 쓰다듬는 손길 못지않게 부드럽고 따뜻하다. 햇살 따라 나도 모르게 몸이 조금씩 옮아간다.
햇살은 모든 걸 바꿔놓는다. 바람도 그 가운데 하나. 입춘 무렵 부는 바람은 변화무쌍하다. 살랑살랑 부는 산들바람도 있지만 굵은 나뭇가지조차 흔드는 흔들바람은 온몸으로 파고든다. 이 바람은 이른 아침부터 불기 시작해 해가 지도록 분다.
흔들바람이 불 때면 사람이 밖에서 오래 활동하기 어렵다. 들판에서 이 바람을 맞다 보면 많은 의문이 든다. 왜 이렇게 바람이 부는 걸까. 이 바람이 생명활동에 무슨 뜻을 주는 걸까.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사정없이 흔들고, 땅에 떨어져 미처 자리잡지 못한 모든 것을 휘감아 날려버린다.
이런 바람을 해마다 맞으면서 나 나름대로 그 뜻을 해석해보면, 식물에게는 뿌리내리기 위한 자기 점검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잎이 무성한 상태에서 태풍을 맞더라도 굳건히 견디자면 잎이 나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뿌리를 점검해둬야 할 때이리라. 또한 흔들바람은 씨앗을 멀리멀리 퍼뜨리는 구실도 한다. 나는 흔들바람을 한꺼번에 일 욕심 많이 내지 말고 긴 호흡으로 봄을 맞이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이 흔들바람은 입춘부터 봄철 내내 여러 번 불면서 수많은 생명을 흔들어 깨운다. 계절을 바꾸는 바람은 거대한 생명 마라톤의 물결이다.
햇살 따라 땅도 일어선다. 언 땅이 녹는 맛을 아는가. 한 번 언 땅은 쉽게 녹지 않는다. 낮에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면 땅거죽은 살짝 녹는다. 하지만 더 깊은 땅속은 얼어 있으니까 그 속으로 녹은 물이 스며들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사람이 다니려고 하면 질척거린다. 내 발자국이 내 발목을 잡는 형국이랄까. 낮에는 땅거죽이 녹았다가 밤이면 다시 얼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땅속 깊이까지 녹는다. 그럼 위에 남아 있던 물기가 땅속으로 스민다. 이 상태로 며칠 지나면 흙은 보송보송하다. 사람이 밟으면 살짝 발자국만 남을 정도로 편안하다. 땅도 온기가 돈다고 할까.
땅에 온기가 돌면 드디어 풀과 곡식이 일어선다. 영하 16도나 되는 겨울을 거뜬히 이겨내는 풀과 곡식, 채소와 과일 등이 있다. 풀은 광대나물, 개망초, 냉이, 꽃다지, 점나도나물, 쇠별꽃 등이고, 곡식은 밀, 보리 등이다. 양파, 마늘, 딸기, 시금치, 대파도 그렇다. 언 땅에서는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가 땅이 풀리면 뿌리를 뻗고 광합성을 시작한다.
처음으로 땅이 풀린 날, 그 기념으로 냉이를 캔다. 이즈음 냉이는 대부분 자그마하다. 어쩌다 제법 큰 냉이를 발견하면 그건 횡재다. 무릎 꿇고 정성스럽게 캔다. 겉으로 보이는 잎은 크지 않지만 땅속의 뿌리는 사방으로 뻗어 새삼 생명의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산삼 먹는 기분으로 먹는다. 우리 몸도 조금씩 봄이 된다.
1 암탉이 알을 낳는 순간은 엄숙해 두려움이 없다. 2 씨고구마에서 새싹이 차례로 돋는 모습. 느리지만 힘찬 생명력이다. 3 농사 시작을 알리는 왕겨 훈탄 만들기. 4 달이 차오르면 과일나무 가지치기를 한다.
작은 생명의 움직임도 하나둘 눈에 띈다. 겨우내 감식초가 다 익었는지 초파리가 나타난다. 안방 깊숙한 어딘가에서 겨울잠을 자던 무당벌레도 하나둘 깨어나, 방 안을 이리저리 고물고물 기어다닌다. 거북보다 느리지만 생명 활동을 시작하는 엄숙한 걸음이다. 햇살이 좋으면 창 쪽으로 방향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새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집 가까이서 흔하게 보는 참새와 까치는 짝을 짓고 부지런히 집을 짓는다. 그러면서 얼마나 재잘대는지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알람시계다. 사람이 게으르게 늦잠 좀 자려 해도 잘 수 없게 만드는 생명의 울림. 먼 산에서 삣 삣 삣 하고 우는 청딱따구리 소리는 해맑다. 멧비둘기 첫울음은 또 얼마나 애절한가. 구구우 구우. 짝을 찾는 간절한 울림이다. 닭은 둥지에서 하나둘 알을 낳는다. 암탉이 알 낳는 순간은 엄숙해 두려움이 없다.
둘레 자연이 이렇게 돌아가면 우리 몸과 마음도 일어선다. 날 잡아 대청소를 하고, 말린 쑥을 태워 사람이 무탈하기를 기원하며 집 둘레를 소독한다. 입춘은 농사를 시작하는 때다. 바람이 잠잠한 날에는 왕겨로 훈탄을 만들고, 달이 차오르면 과일나무 가지치기를 한다. 겨우내 묵은 나물과 김치에서 벗어나 땅이 녹은 기념으로 하루 걸러 이른 봄나물이다.
농사를 위해 이런저런 씨앗을 점검한다. 씨감자는 땅 냄새를 그리워하듯 싹을 내밀었고, 씨고구마는 이제 막 깨어나 꿈틀댄다. 어쩌다 손가락 마디만큼 자란 싹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 잠을 잔다. 천천히 깨어나지만 그 기운은 싱그럽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시간과 공간을 꽉 채우는 생명력. 새싹이 돋는 모습을 사진 찍어,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둔다. 생명은 쉼 없이 흐른다. 사람도 자연의 한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