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이론’은 운명 속에 파멸하는 스토리를 다룬 본격 한국형 스릴러다.
스릴러 영화의 한국적 재발견은 ‘세븐 데이즈’를 시작으로 ‘추격자’에서 절정을 이뤘다. 2010년 영화계는 새로운 스릴러의 문법을 갈망하고 있다. 설경구 주연의 ‘용서는 없다’도 그렇고, 곧 개봉할 영화 ‘평행이론’ 역시 한국적 스릴러의 경신이라는 목표에 도전하고 있다.
‘평행이론’은 일종의 음모론과 닮아 있다. 케네디와 링컨의 생애 주요 시점이 거의 같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0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금요일에 1839년생 암살범에 의해 죽는다. 한편 존 F. 케네디는 1960년에 대통령이 되고 같은 금요일 1939년생 암살범에 의해 살해된다. 이 기막힌 우연성은 이미 누리꾼이나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필연적 원칙으로 확산됐다.
권호영 감독은 평행이론을 한 판사의 생애에 도입한다. 30년 전 똑같이 최연소 부장판사가 됐던 한 남자의 생애가 지금 새롭게 부장판사가 된 남자의 생에 겹친다는 이야기로 말이다.
영화는 우연한 일치가 과연 평행이론이라는 초월적 운명론의 결과인지, 아니면 사람이 꾸며낸 시나리오인지 사이에서 관객에게 내기를 걸어온다. 관객은 여러 편의 영화와 미국 드라마로 단련된 추리 솜씨로 권 감독이 건네는 질문과 내기에 추리로 응수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영화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기만의 유니크한 질문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운명이 아닌 음모처럼 보이려고 마련한 장치들에서 논리적 허점이 발견되고 운명으로 결론짓기 위해 마련한 결말은 급조한 반전과 닮아 있다. 예컨대 판사 주변에서 그를 도와주는 여기자의 역할은 너무 보편적이고, 그녀가 당한 사고조차 예상 가능하다. 심지어 일간지 여기자가 서울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설정은 말 그대로 영화적 선택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 스릴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그 ‘동네’의 느낌을 끌어오기 위한 무리수로 보인다는 뜻이다.
오늘날 관객들은 영민하다 못해 영악하다. 반전이라는 영화적 서프라이즈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히 단련됐다. 반전이 다만 관객이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 데려다놓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관객은 뒤집히는 순간 이미 뒤집힌 순간의 필연성까지 생각한다. 결말에서 밝혀진 진실에는 ‘진실’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영화를 드는 건 아니지만 관객들은 막연한 상태로나마 어떤 스타일과의 유사성을 짚어낸다. 이런 점에서 보면 ‘평행이론’은 기존의 한국 스릴러 영화나 미국 드라마의 스타일을 혁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흥미로운 점은 ‘평행이론’이 메멘토적 인물을 새롭게 제시하고 해석한다는 사실이다. 완벽하고 멋진,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한 주인공이 자신이 세워놓은 거대한 계획 안에서 무너진다. 고전 비극과 닮아 있는 파국은 복잡한 운명에 빠진 인물의 운명을 품위 있게 수식한다.
‘수’나 ‘H’에서 확인했던 바지만 어딘가 깊은 우울을 담고 있는 지진희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전폭적 지지를 받은 한국형 스릴러였기에, 바로 다음 행보가 무겁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일보 전진 중인 한국 스릴러 영화에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