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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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방콕족을 달래는 책

  • 입력2008-07-23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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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이성형 지음/ 창비 펴냄

    우리는 지금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신성한 권리를 박탈당한 채 권태로운 사무실이나 습기 가득 찬 방에서 무더위와 맞싸우고 있으니, 이 비인권적인 상황을 개선할 만한 인문적 향수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이 요긴하다. 여기 이성형의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가 있다.

    책 제목처럼, 책을 펼치자마자 우리는 아바나로 떠난다. 쿠바의 수도, 혁명의 열기와 그 노쇠함들 그리고 비(非)자본적 삶에 대한 검소한 실험이 남아 있고, 무엇보다 그들의 삶을 지켜온 음악이 있는 곳이다. 이성형은 아바나를 비롯한 중남미 여러 지역의 쓸쓸한 풍경들을 그윽한 문체로 쓰다듬고 있다. 중남미 일대의 역사와 문화와 음악과 삶이 이성형의 물기 촉촉한 문장들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인다. 책을 읽다 보면 그런 풍경이 실제로 떠오른다. 기이한 일이다.

    거룩하고 뜨거운 삶이 숨쉬는 라틴으로 공간 이동

    애이불비(哀而不悲)! 오래전 국어시간에 배운 말이다. 슬프되 그 슬픈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 혹은 슬프긴 하되 아주 비참한 상태는 아닌 것, 그런 뜻이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그런 정한이다.

    이 감정이 우리의 내면을 대표한다면 조금 마땅찮은 구석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감정은 결코 천박한 애상이 아니라 삶의 비탄을 거룩히 승인하면서 끌어안는 것! 저 라틴의 굽이굽이 많은 나라들의 강과 항구와 산맥들 속에 유장히 깃들어 있음을 이성형은 아름답게 그려낸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음악에 대해, ‘중국의 닉슨’ ‘클링호퍼의 죽음’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존 애덤스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빌려 다음처럼 묘사한 것과 같은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b>정윤수</b><br>칼럼니스트·‘축구장을 보호하라’ ‘100과 사전’저자

    “흠집 많은 인간의 혼란, 땀과 연기에 찌든, 백합 향기와 오줌 냄새를 맡는, 음식 자국과 죄에 물든, 낡은 옷처럼, 주름진 육신처럼, 감시, 꿈, 불면, 예언, 사랑과 미움의 말들, 어리석음, 충격, 목가, 정치적 신념, 부정, 의심, 긍정 따위로 순결을 잃은 영혼….”

    이 책을 펼치자마자 우리는 순식간에 중남미의 풍광 속으로 공간 이동을 하게 된다. 그것이 첫 번째 미덕이다. 습기 찬 침대맡에서 한순간에 쿠바와 해변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우리의 첩첩산중 정선 아라리나 저 가없는 바다의 육자배기와 다를 바 없는 문화의 속살을 보여준다. 쿠바 페루 칠레 멕시코의 역사와 삶과 문화의 ‘애이불비’를 읽다 보면, 이 애틋한 감정이 가난한 세계 가난한 자들의 거룩한 정서적 연대가 될 수 있음을,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책을 다 읽고 나면? 세상 두 쪽 나더라도 사무실이며 습기 찬 방 따위는 잊어버리고 인천공항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

    내 젊은 날은 온통 여자들이었다. 모든 슬픔은 여인에게서 왔고, 즐거움과 상상력은 여인으로 매개됐다. 또래 여학생들에게 나는 세계문학전집 여주인공들의 이미지를 덧입혀 사랑을 고백하고, 쫓아다녔다. 그러한 환상에서 시작한 내 사랑은 늘 몇 달 안에 덧나곤 했다.

    머리칼이 아름다웠던 ‘그녀’는 내게 칼바도스를 마시던 ‘개선문’의 여인이었다. 그녀에게 나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권했다. ‘오바이트’는 나만 했다. 피아노를 전공하던 ‘또 다른 그녀’는 손이 유난히 작았다. 그녀가 피아노 건반의 한 옥타브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손에 절망할 때 나도 같이 절망했다. 그녀는 손이 차가웠던 ‘라 보엠’의 미미였다. 이마가 예쁜 의상학과의 그녀를 나는 제인 에어라고 불렀다. 나는 밤늦게 전화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차이에 관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연애모임이나 다름없는 독서클럽에서 앰한 녀석들과 키득대는 것에 대한 나름의 복수였다. 이런 내 산만한 환상을 감당할 수 있는 여학생은 없었다. 약간의 관심을 보이다가 이내 짜증스러워하며 돌아서곤 했다. 한결같이.

    어느 여름, 나는 나를 버린 여인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름방학 내내 가장 어려운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가장 어려운 책을 읽기로 한 것이다. 땀으로 살갗이 장판바닥에 달라붙고, 선풍기에서 더운 바람만 나오는 그 여름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보내면 그녀들이 나를 버린 것을 후회하리라 믿었다. 어렵다는 헤겔의 책을 사러 갔다가 더 어려워 보이는 책을 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저자의 이름부터 발음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바로 그 여름, 나는 여인들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 책은 나처럼 소심한 저자가 조르바와 함께 보낸 ‘벗어던짐’을 서술한 책이다. 둘이 계획한 사업이 망하던 순간 조르바가 추던 춤이 그에게 즐거운 충격이었듯, 내게도 조르바의 자유로움은 엄청난 충격을 줬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실험하던 조르바의 삶은 내게 여인 말고도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줬다. 나는 조르바의 말투를 흉내내 중얼거리곤 했다. “여자 같은 건 쥐나 물어가라지.”

    인생 무한 자유의 실험 이 남자가 사는 법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b>김정운</b><br>명지대 여가문화연구센터 소장· ‘노는 만큼 성공한다’ ‘일본 열광’ 저자

    도자기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고 손가락을 잘라버린 조르바. 함께 자고 싶어하는 여인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지옥에 떨어지고 말 거라며 협박하던 조르바(나는 그 옆에 ‘함께 자고 싶어하는 남자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여자도 지옥에 떨어질 거야’라고 적었다). 자유롭고 싶으면 터질 만큼 처넣으라던 조르바. 이런 조르바식 자유론은 당시 내겐 여인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조르바식 자유론을 몇 날이고 일기장에 반복해서 썼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렇게 내 철없던 청춘은 갔다.

    이제 여인은 더 이상 40대 후반의 나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아내의 굵은 팔뚝이 내 유일한 안식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여인과는 상관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바라게 된다. 그러다 보니 두려운 것도 많은 요즘이다. 아, 내겐 다시 조르바식 자유가 필요하다. 끈적끈적한 장판바닥을 뒹굴며 다시 읽어야 할 책, ‘그리스인 조르바’.

    내 이름은 빨강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

    샐러리맨에게는 시간이 곧 무기지만 방콕족에게 시간은 적이다. 하염없이 흘려보내도 남은 하루, 방 안에서 보내는 하루는 그토록 기다렸던 그 ‘휴가’와는 다르니 말이다. 방콕족에게는 두 가지 정언 명제가 있다. 하나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재미있게 보내야 한다는 것.

    이런 방콕족에게 적합한 책은 아무래도 추리소설이 될 확률이 높다. 두뇌와 정서, 경험 모두를 동원해 작가가 제시한 질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능동적 독서 참여가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많은 추리소설이 삼류와 일류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대중소설 하면 추리소설을 떠올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품위 있고 의미까지 담긴 추리소설은 없을까?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슬람 갈등과 고민 그 조각 퍼즐 맞추기

    ‘내 이름은 빨강’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어쩌면 벌써 겁먹은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노벨상이라니, ‘백 년 동안의 고독’이나 ‘악마의 시’처럼 길고 어려운 책 아니냐”고 말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두 권으로 번역돼 있다. 시간의 여백을 긴 책으로 채우고자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반가운 일이겠지만, 한 권이 넘는 책이라면 겁부터 내는 독자에게는 분명 부담스러운 부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내 이름은 빨강’은 두 권을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이 소설의 전체 틀이 추리소설이라는 점과도 연관된다. 이 소설은 이미 우물에 빠져버린 시체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흥미롭지 않은가. 죽은 사람이 말을 하다니. 이제 소설은 ‘과연 그 남자를 누가 죽였는가’라는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흥미는 한 남자의 죽음을 다루는 이 과정에서 복잡다단한 문제점이 드러난다는 데서 일어난다. 마치 실타래가 풀어져나오듯 사건은 점입가경으로 확장된다. 단순한 살인 사건인 줄 알았던 상황은 이슬람 제국, 근대화, 전통, 사랑과 같은 복잡한 문제와 함께 심화된다. 게다가 그의 죽음에는 한국으로 말하자면 ‘도화서’화원이라고 부를 만한 왕정 화가들의 갈등이 깊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새로운 화풍과 고전적 화법이 대결하고, 이 과정에서 이미 누군가의 죽음이 예견됐던 것이다.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b>강유정</b><br>문학·영화 평론가

    한편 이 이야기들 속에는 아름다운 여성과 의젓한 남자의 사랑이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내 이름은 빨강’은 정치에 관한 소설이면서 진지한 예술론을 펼치는 작품이며, 한편으로는 고귀한 사랑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 소설의 장점이라면 한데 어울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이슬람 전통 세밀화처럼 촘촘히 엮여 펼쳐진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작가가 제시하는 단서를 하나씩 따라가며 이제까지 잘 몰랐던 이슬람의 세계와 갈등, 고민을 발견하게 된다. 조각 퍼즐을 맞춰 그림을 완성하는 재미가 있다는 뜻이다. 지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다.

    파타고니아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혜강 옮김/ 달과소 펴냄

    중학교 때 지리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지도상 세계지명찾기 게임을 제안했다. 그는 우리에게 ‘푼타아레나스’를 찾아보라고 했다. 수업시간이 다 가도록 아무도 찾지 못했다. 마지막에 선생님이 지구본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은 바로 이 땅의 정반대편에 있었다. 남아메리카의 남단, 세상의 끝이라 부르는 파타고니아(Patagonia)의 맨 끄트머리였다. 이후 나는 파타고니아를 잊지 못했다.

    파타고니아 건너편 섬 이름은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 불의 땅이라는 뜻이다. 대항해 시대에 이 지명들은 가장 강렬한 기표 중 하나였으며, 그것들의 이중주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유혹적인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곳에 가면 아무것도 살고 있지 않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과 생물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대형서점 한구석에 단 한 권 꽂혀 있던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를 찾아내기 전까진 그랬다.

    영국 출신의 채트윈이라는 사내는 10대에 미술품 경매회사인 소더비에 수위로 들어가 전문 미술품 감정가의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18세에 이미 피카소의 위작(僞作)을 가려낼 만큼 뛰어난 감식안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잘나가던 그가 어느 날 파타고니아에 가겠다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난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이 책 ‘파타고니아’를 발표했다.

    그가 파타고니아를 가슴에 품게 된 건 어린 시절, 선장이던 친척이 파타고니아에서 가져온 가죽 한 장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것을 브론토사우루스의 가죽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것이 공룡 가죽이 아니라 선사시대 살았던 거대한 땅늘보의 가죽임을 알게 됐지만 그때부터 채트윈에게 파타고니아는 공룡이 살던 ‘잃어버린 세계’요, 그 때문에 반드시 방문해야 할 장소로 마음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지구 반대편 땅에 누가 살고 있을까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b>박종성</b><br>KBS 라디오 PD· ‘생각의 탄생’ 역자

    그렇다면 그가 찾은 파타고니아는 어떤 땅이었던가. 그곳에는 공룡과 유니콘의 흔적을 찾거나 원주민 땅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던 유럽의 몽상가들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등지고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려던 이주자들이 머물고 있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생존의 터전이었던 것.

    빙하와 호수, 삼림과 만년설, 황야만 존재할 것 같은 파타고니아가 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지구 반대쪽 이민자들, 독일인 동네, 웨일스인 마을, 러시아 망명자들, 스코틀랜드 출신의 목장주들, 그뿐인가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로 잘 알려진 갱,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미국 경찰의 수배를 피해 몸을 숨기고 살았던 장소임을 책은 재미있고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나와 정반대에 있는 것만큼 강한 인력(引力)을 가진 것은 없으며 대척점처럼 매혹적인 장소도 없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들이 사실 직선거리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설이라면 여행 또한 역설이니, 우리로 하여금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것은 ‘판타지’지만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현실’이다. 결국 우리가 발견한 새로움은 친숙한 새로움이며, 익숙함은 새로운 익숙함일 터다. 이 책을 다 읽고 내 방이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통찰의 기술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外

    신병철 지음/ 지형 펴냄

    ‘방콕족’이라고 해서 청승을 떨 필요는 없다. ‘방콕’하면서도 뉴욕이나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고요하면서도 은은한 ‘영혼의 방’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파스칼도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독한 공간을 고요하게 견디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먼저 일상의 누더기로 가득한 마음을 비우자. 박형준의 시처럼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공중(空中)의 한가운데에 자신을 눕혀보자. 그러면 ‘뼛속까지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처럼 몸도 가벼워진다. 그 다음에는 생각의 날개를 활짝 펴자. 비어 있는 마음의 공간으로 사색의 기쁨이 서서히 차오를 때 새로운 엔도르핀이 온몸을 감싼다. 그 순간 아주 맑고 싱그러운 ‘또 하나의 나’가 보인다. 여태껏 몰랐던 내 뒷모습도 드러난다. 이 놀라운 발견은 우리 인생의 변곡점을 비추는 거울과 닮았다.

    바로 이럴 때 읽을 만한 책으로 ‘통찰의 기술’을 추천한다. 통찰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과 핵심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재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재들의 직관과는 다르다. 인문학의 ‘통섭’과 서로 통한다.

    이 책이 알려주는 통찰의 기술은 일곱 가지다. 그중에서도 고(故) 정주영 현대 회장의 일화가 재미있다. 그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부산 유엔군 묘지를 방문하기 직전, 한겨울의 묘지가 너무 썰렁하니 잔디를 깔아달라는 ‘황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