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28

2024.02.23

수원화성과 삼성전자의 물길 풍수

[안영배의 웰빙 풍수] 깨끗한 물이 도시 풍요 좌우… 수원 원천리천 복원 후 삼성전자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 안영배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풍수학 박사)

    입력2024-02-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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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개혁군주 정조는 1796년 수원에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했다. 당시 유천성(柳川城)으로도 불리던 수원 화성(華城)과 거처인 행궁(行宮)이다. 화성은 정조가 수원 화산(花山) 자락 명당 터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융릉)를 이장하면서 함께 건설한 성이다. 정조는 당시 권력을 장악한 한양의 노론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이상적인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역시 융릉만큼이나 빼어난 명당으로 규정했다. 또 이곳이 한양과 삼남(충청·호남·영남)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 길목이라는 점을 감안해 교통과 상업 중심 도시로 육성했다. 상인들이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도록 여러 정책을 펼쳐 시전이 펼쳐진 한양 종로처럼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화성행궁 앞 도로는 아예 종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상업과 함께 농업도 발전시켰다. 백성이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황무지를 개간해 농경지를 만들고 저수지도 곳곳에 조성했다. 수원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농업기술의 메카로 자리 잡은 배경이기도 하다.

    수원 민심 다독인 버드나무 숲

    수원화성 지도. [안영배 제공]

    수원화성 지도. [안영배 제공]

    수원화성은 전반적으로 명당 터임에도 약점 또한 있었다. 바로 화성 내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물길인 유천(柳川·수원천)이 그것이었다. 북쪽 광교산에서 흘러내려온 유천은 수원화성 북수문(화홍문)을 통과해 성내를 관통한 뒤 남수문을 거쳐 곧장 빠져나가고 있었다. 풍수에서는 물이 나가는 곳인 수구(水口)가 시각적으로 휘어져 돌아가는 등 막힌 모습을 보여야 기가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유천의 수구는 반대로 뻥 뚫려 있었던 것이다.

    조선 역대 왕 중 풍수에 가장 해박했던 정조는 이를 모르지 않았다. 정조는 옛 평양성과 선산읍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무숲을 조성했다는 사실을 들면서 수원화성 곳곳에 버드나무를 비롯해 뽕나무, 느티나무 등을 많이 심게 했다. 이는 수구가 ‘열려 있는’ 유천을 시각적으로 차단하는 동시에, 임금의 나들이 거소인 행궁을 기준으로 미약한 좌청룡, 우백호 줄기까지 숲으로 보완하는 일석이조의 비보책이었다.

    이처럼 지형상 약점이나 흠결 등 모자라는 곳을 채우는 행위를 ‘비보(裨補)풍수’라고 한다. 오늘날 수원화성 주변에 버드나무(柳·유)가 즐비한 것도, 수원화성이 유천성으로 불리는 것도 정조의 대대적인 조림사업 덕분이다. 심지어 정조는 화성 성곽도 기다란 버들잎 모양으로 조성했다.



    정조가 유난히 버드나무에 집착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사연은 정조 때보다 130여 년 앞선 현종 때(재위 1659~1674)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현종 아버지인 효종의 능지 후보지(현 영릉)를 두고 극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비기(秘記)에 국가에 일이 생기면 수원에서 변이 일어나 서울과 나라 안이 불안해질 것”이라는 참언까지 등장하며 수원 반대론이 우세했다. 결국 수원 화산은 잊힌 땅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 땅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정조로서는 수원 땅의 민심이 부드럽지 못하다는 당시 참언에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억만년의 유구한 계획은 인화(人和)가 가장 귀한 것”이라고 강조한 정조가 아니던가.

    결국 정조는 대안으로 버드나무를 찾았다. “기자가 조선 풍속이 억세고 사나운 것을 보고, 버드나무의 본성이 부드럽다는 이유로 백성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버드나무를 심게 하였다. 이 때문에 평양을 일명 유경(柳京)이라고 하였다”(‘연려실기술’)라는 기록이 그 근거일 것 같다. 평양 사람들의 거친 기질을 부드러운 버드나무가 다독여준다는 비보적 개념은 조선 사회에서 오래된 전승이었던 것이다.

    수원 풍요 좌우하는 수원천

    정조의 꿈을 담고 있는 수원은 이후 한국 국운과 함께 부침의 역사를 겪었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8년 수원화성 북수문인 화홍문이 1원 지폐 도안에 채택될 정도로 화성은 인기 있는 명소였다. 화홍문 아래로 흐르는 수원천(유천)은 고기를 잡고 멱을 감는 등 수원 사람들의 휴식처였다. 그러다 6·25전쟁 이후 피란민이 모여들고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원천은 과거 서울 청계천처럼 수질이 오염되고 환경이 열악해졌다.

    수원천은 1990년대 초반 수원천 정비사업 일환으로 일부가 복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풍수적 시각에서는 도시 발전과 교통난 해소를 위해 도심 내 혼탁해진 하천을 무작정 복개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물은 재복(財福)을 관장하는 중요 요소다. 맑고 깨끗하게 흐르는 물은 해당 도시의 풍요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개 친환경적인 자연천은 양수(陽水)로 순기능을 하지만, 썩은 물이나 복개천 등은 음수(陰水)로서 역기능을 한다. 복개천 지역이 대부분 슬럼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에서도 알 수 있다.

    다행히 수원천은 수원 시민의 ‘수원천 되살리기 운동’으로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고, 2012년 자연형 생태하천으로 완전히 복원됐다. 정조가 애지중지하던 버드나무들도 살아났다. 수원천 복원 전후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필자는 수원천 일대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복원 이후 수원천 일대에 생기가 돌았고, 인근 시장 상인들에게서도 활력이 느껴졌다. 수원천은 물의 변신과 이에 따른 기운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풍수 현장이었다. 게다가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수원 일대는 관광과 문화 중심지로 더욱 발전하고 있다.

    한편으로 수원천, 황구지천 등과 함께 수원 4대 하천 중 하나인 원천리천은 삼성전자와 인연이 깊은 물길이다.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삼성전자 본사(영통구 매탄동)가 자리한 곳은 원천리천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모양새다.

    물길 기운 톡톡히 본 수원 삼성전자

    수원에 자리한 삼성디지털시티. [안영배 제공]

    수원에 자리한 삼성디지털시티. [안영배 제공]

    수원과 삼성가의 인연은 삼성그룹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모친의 선영을 이곳으로 이장한 다음 1969년에 인근 영통구 일대에서 삼성전자공업㈜을 창립했다. 이곳에서 라디오와 TV 생산 라인을 갖추고 인력 36명으로 출발한 삼성전자는 이후 고속 성장을 거듭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났다.

    흥미롭게도 삼성전자의 발전은 이곳 원천리천 변천과도 연결된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원천리천은 농업용수로 사용된 농촌 하천이었다. 삼성전자 터를 감싸듯이 돌아나가는 원천리천(전체 9㎞)은 한때 주변에 공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제방이 축조됐고, 도시화에 따른 수질오염 등으로 생태환경이 파괴되기도 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 원천리천이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이후 삼성전자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 주력인 스마트폰 사업의 대성공으로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원천리천이 건강한 하천으로 복원된 이후 삼성전자에 풍요의 생기를 불어넣은 것도 한몫했다는 게 풍수적 시각이다.

    사실 물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작업을 실천해 청계천을 오늘의 형태로 만들어놓은 주인공이다. 영조는 한양의 땅기운이 다해 왕조가 바뀔 것이라는 참위서가 나돌자 청계천 물길 살리기를 통해 한양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 역시 수원천 물길을 아름답게 포장해 민심을 다독이며 새로운 도시를 개척했다. 이를 보면 삼성전자 임직원들이 원천리천을 제 집 명당수인 양 아끼고 잘 가꾸는 것도 기업 미래를 위해 그 의미가 작지 않다고 할 것이다.

    아름다운 웅장함이 깃든 수원 화성행궁. [안영배 제공]

    아름다운 웅장함이 깃든 수원 화성행궁. [안영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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