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홍련암.
한반도에 풍수가 유입된 것은 중국 유학승을 통해서였다. 그들이 창건하거나 머문 절들은 풍수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고려와 조선의 명풍수들 가운데 스님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흔히 사람들은 유명 사찰은 모두 명당에 위치해 있으며, 그래서 큰스님이 많이 나오고 신도 수도 많다고 생각한다. 또 그러한 까닭에 절의 규모도 커야 한다고 믿는다. 아마도 낙산사 역시 화재 이전의 규모이거나 그보다 더 크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 터를 잡은 의상대사가 생각했던 절의 규모나 입지가 어떠했을까를 헤아려보는 것, 그것이 풍수 논리로 본 ‘절의 진정한 복원’이다. 그러면 낙산사의 입지와 땅의 풍수적 성격은 어떨까?
터 성격 무시한 증축이 10여 차례 큰불 불러
불타기 전 낙산사를 풍수적으로 풀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거대한 소나무 숲과 풀들이 절을 에워싸고 있어 전체 지세를 살피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산불은 주변의 나무를 태워버렸고, 불타버린 나무들은 대부분 잘라졌다. 겨울철인 지금은 잡풀마저 사라져 땅의 맨살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복원될 절의 규모나 입지가 어떠해야 할지를 맨몸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2005년 낙산사 화재에서 불길을 피한 보타전 일대.
이렇게 힘들게 내려온 산 능선이 동해바다를 만나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춘 곳이 보타전이 자리한 움푹 파인 부분과 홍련암이 있는 암벽이다.
본래 절터 주변은 바위가 많아야 하는데, 낙산사는 전체적으로 흙산(육산·肉山)이다. 홍련암 부근에서 겨우 바위를 드러낼 뿐이다. 이렇게 축 늘어진 흙산은 중심축이 돼야 할 주산(主山)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보타전 뒤 산이 주산이라고 하겠는데, 주산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설악산에서 출발한 능선이 원통보전(화재로 소실됨) 뒤를 지나 홍련암 쪽으로 흘러가는 주필산(駐山)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터는 절터로 적절하지 않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의상대사가 터를 잡았을 때 땅의 성격을 몰랐을 리 없다. 바로 홍련암 부근 암굴이 스님 한두 명의 득도를 위한 수도처로 적절하다. 또 이곳과 산 능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보타전 자리의 움푹한 부분 역시 비보사찰(裨補寺刹·자연재해나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약간의 승려가 상주하는 곳)로 알맞다.
그런데 이러한 터의 성격을 무시하고 보타전 오른쪽(정면에서 보면 왼쪽) 능선 위에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범종각 등 대부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나가는 용(과룡·過龍)이라 하여 집 짓기를 꺼리는 곳이다. 흥하다가도 곧 패하는 속성속패(速成速敗)의 땅이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길이고 화재에 대책이 없는 곳이다. 실제 낙산사는 창건 이래 10여 차례 큰불이 있었다. 오랜 역사 동안 화재가 없을 리 없지만 이것은 지나치다.
의상대사가 이곳에 절을 지으려 했을 때의 입지와 규모, 공간배치를 살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복원이다. 그럴 경우 홍련암 부근에는 더 이상 보조 건물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보타전이 자리한 움푹한 부분에 작고 아름답게 절을 지어야 한다.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원통보전 일대에 굳이 건물을 세우려 한다면, 복원될 종이 있을 범종각 정도가 전부다. 그것이 진정한 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