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동종 보살.
춘원을 얘기할 때마다 두 가지 평가가 충돌한다. 현대문학의 거봉이라는 관점과 친일 지식인이었다는 그것이다. 그의 양면성은 또 있다. 천주교 신자였다가 광복 전에 불교로 귀의했다는 점이다. 춘원은 금강산을 유람하며 그곳의 절이나 암자에 머물면서 불경을 접한 뒤 장편소설 ‘원효대사’를 썼고 ‘법화경’의 매력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춘원은 금강산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쫓기던 운허 스님을 만난다. 운허는 춘원의 삼종제(三從弟), 즉 팔촌동생으로 그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게 된다. 이때 운허는 춘원이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청담에게 만류를 부탁한다. 불경의 이해가 깊지 못한 상태에서 오역하여 세상에 내놓을 경우 그 피해가 클 것인 데다, 춘원은 대중에게 영향력이 큰 소설가였던 까닭이다.
결국 청담은 자하문 밖에 사는 춘원을 찾아가 일주일간 격론을 벌인 끝에 번역을 중단케 하고 불교에 귀의시킨다. 그때 청담은 춘원에게 ‘원각경’과 ‘능엄경’을 먼저 공부한 다음 번역하라고 권했는데, 3년 후 청담을 만난 춘원은 “내 고집대로 ‘법화경’을 번역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춘원이 광복 후 친일 변절자라 하여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경기 남양주 봉선사로 몸을 숨긴 것은 그곳에 운허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춘원은 봉선사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차를 만난다. 그가 묵었던 방은 다경향실(茶經香室)이었다. 차와 경전의 향기가 가득한 방이다. 이때 춘원은 차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1946년 9월18일 ‘산중일기’에 연시조 형태의 다시(茶詩)를 지어 남긴다.
“화로에 불붙어라 차 그릇도 닦았으라/ 바위샘 길어다가 차 달일 물 끓일 때다/ 산중에 외로이 있으니 차맛인가 하노라.
내 여기 숨은 물을 알릴 곳도 없건만은/ 듣고 찾아오는 벗님네들 황송해라/ 구태여 숨으 아니라 이러거러 왔노라.
찬바람 불어오니 서리인들 머다하리/ 풀잎에 우는 벌레 기 더욱 무상커다/ 저절로 되는 일이니 어 무삼하리로.”
풀벌레 우는 초가을 밤에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마시는 춘원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된다. 그도 한때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일에 일조했다 해서 옥살이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일제의 침략 정책에 동조하는 친일 지식인이 되고 만다. 그렇게 살아온 그의 눈에 세상은 번뇌의 불이 붙은 ‘불타는 집(火宅)’으로 보였으리라. ‘산중일기’ 9월20일자에는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봉선사 어귀의 이광수 기념비.
얼마나 향기로웠으면 차를 마시지 못하고 입 안에 머금고 있었을까. 차맛이 외로움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나그네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차맛이란 외로워야만 더 깊이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가는 길
경기 의정부에서 포천 방면으로 43번 국도를 이용해 축서령을 넘자마자 오른편으로 10여분 가면 봉선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