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선사의 자취가 남아 있는 성륜사 전경.
오늘날 작은 면 옥과의 이름을 빛내는 것은 설옥리에 있는 옥과면의 진산인 설산(雪山)의 성륜사다. 우리 시대의 선승으로 널리 알려진 청화선사가 일군 이 절은, 설산 정상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의병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금샘·은샘과 더불어 옥과의 자랑거리다.
필자가 옥과에 간 날은 마침 청화선사의 입적 1주기라 전국 각지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로 높이 523m의 야트막한 산이 온통 북적거렸다.
청화선사의 속명은 강호성(姜虎成). 1923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뒤 출가했다. 진보적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전남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송만암 대종사의 상좌였던 금타화상을 스승으로 해 수행에 들어간 뒤 하루 한 끼 공양과 좌선 수양을 위한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평생 신조로 삼았으며, 이후 40여년 동안 전남 두륜산 대둔사, 월출산 삼견성암, 지리산 백장암 등 전국 각지의 사찰과 암자의 토굴에서 계율을 엄격히 지키면서 수도 정진했다고 한다.
한적한 옥과면 수리 마을.
청화선사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5년. 탁발수행과 떠돌이 선방좌선을 매듭지은 뒤 6·25전쟁(1950) 때 불타버린 이후 쇠락해 있던 전남 곡성군 태안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그해 10월부터 21명의 도반과 함께 3년 동안 일주문 밖에 나서지 않은 채 묵언(默言) 수도를 하면서부터다. 청화선사의 3년 결사(結社)는 당시 세속의 이익에 급급해 수도 정진을 게을리 했던 불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뒤 청화선사는 옥과의 성륜사를 일으켜세웠고, 미국에까지 한국 불교를 전파하다 2003년 타계했다.
선사는 평소 “모든 수행은 정견(正見)을 바탕으로 ‘선오후수(先悟後修·먼저 깨닫고 나중에 수행하는 것)’하는 것이니 불성(佛性) 체험에 역점을 두고 정진하라”고 강조했고, “불교든 기독교든 역사적으로 위대한 철학이라고 검증된 것이라면 믿어볼 만하다. 성자의 가르침은 하나 된 우주의 법칙으로, 불교나 기독교는 수행법이 서로 다를 뿐 궁극적으로 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러한 선사에 대해 시인 최하림은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향훈(香薰)의 큰스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옥과면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향교.
조선시대 관사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옥과면사무소가 들어서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다. 면사무소 담 앞에는 지금도 관찰사 조헌영 서기순, 현감 이규현 등의 비석 21개가 서 있어 이곳이 과거의 관사 터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옥과면사무소에 들어가보니 서울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지도를 사진 찍어다 확대해 그렸다는 옥과현의 지도도 걸려 있다. 저렇게 실재했던 옥과현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리다니.
이곳이 옥과현이던 시절, 관사 동쪽에 있던 누각 의운루(倚雲樓)를 보고 조선 전기의 문신 성임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누에 오르니 경치가 한없는데, 봄이 다되매 홀로 머리를 긁적이네. 빈 평상엔 소나무가 비 소리로 울고, 먼 촌락에는 보리 가을이로세. 관산(關山)에서 북쪽 바라보기에 신세(身世)는 동으로 흐르는 물에 부쳤다. 낮과 밤으로 시름 많은 구름이 합하니, 돌아가고픈 마음 거둘 수가 없도다.’
관사에서 멀지 않은 옥과 동헌이 있던 자리에는 오늘날 노인정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현감이 집무를 보던 집 한 채가 달랑 남아 있고, 옆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유팽로를 모신 사당인 옥산사와 서낭당 등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동헌 터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의 서낭당은 ‘조장군 사당’이라고도 불리는데, 단칸 맞배지붕(경사진 지붕이 맞닿아 있는 모양) 형태인 이 건물에 남녀 목신상 2개와 머리가 떨어져나간 동자 석조상 1개가 모셔져 있다. 남신상은 길이가 83cm이고, 여신상은 68cm. 그 형태를 보면 남신상은 무당이 쓰는 모자를 쓰고, 큰 눈썹에 눈이 튀어나와 있어 마치 장승 같아 보인다. 흉대를 두르고 중앙에서 묶었는데, 띠가 발등에까지 내려와 있다. 여신상은 머리에 고깔 같은 것을 쓰고, 얼굴이 남신상보다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모아쥔 두 손은 무엇인가를 들고 기원하는 모습이다. 서낭당에는 고려 신종 때 학자인 조통(趙通)에 관한 전설이 서려 있다.
옥과면사무소 뜰에 서 있는 관찰사, 현감들의 비석.
술 쏟아 땅 파자 술이 … 별스런 사연 열녀비
옥과 곳곳에는 이처럼 역사와 사연이 담긴 지역들이 많다. 옥과면 합강리에는 ‘팽로 말 무덤’이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유팽로가 왜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의 말이 주인의 머리를 물고 300리 길을 달려 생가가 있는 곳까지 와서는 아흐레 동안 여물을 마다하고 계속 울기만 하다 굶어죽은 데서 붙은 이름이다. 이웃 사람들이 충성스러운 말의 죽음을 기려 그 자리에 말 무덤을 쓰고 ‘팽로 말 무덤’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옥과 동헌에서 동쪽으로 6리쯤 되는 지점에는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에 딸린 대부역(大富驛)이 있었다. 이 마을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이곳에 살던 선비 송광언(宋光彦)의 아내 함평 이씨는 삯바느질해서 술꾼 남편에게 술을 사주었다. 어느 날인가도 아내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술 한 대접을 사서 부뚜막에 올려놓았는데, 그만 실수로 쏟고 말았다고 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황망해하다 땅을 파보니, 그 자리에서 술이 고스란히 나오는 게 아닌가. 이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은 남편을 잘 섬긴 열녀라 하여 함평 이씨의 열녀비를 세워주었다. 곳곳을 다니며 수많은 열녀비를 보았지만, 이처럼 별스런 사연의 열녀비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전설만 전해져올 뿐 아무리 찾아도 열녀비가 눈에 띄지 않았다. 시제를 지내고 있는 제각에 들어가 묻자 열녀비가 근처 풍산면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사연인즉 30여년 전쯤 경지 정리를 하다 그 여인의 친정인 풍산의 함평 이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열녀비를 가져갔다는 것. 마을 사람들은 이제라도 찾을 수 없겠느냐며 울상이지만, 함평 이씨 집안에서 돌려줄 리 만무하다.
‘정감록비결’에 피난처라고 알려져 있는 옥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전란 피해를 본 적이 없는 천혜의 명당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곳에는 ‘수양댐 건설 결사반대, 안개 지역으로부터 옥과를 지킵시다’ ‘쌀 개방 반대 식량주권 사수’라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가볼 만한 곳
옥과에서 멀지 않은 전남 담양군에는 광주호 주변으로 면앙정(免仰亭), 송강정(松江亭), 명옥헌(鳴玉軒),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취가정(醉歌亭), 식영정(息影亭)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들이 줄지어 있다. 전남 곡성군 방향으로 가면 동악 산골짜기와 그윽하고 아름다운 절 태안사, 섬진강 등이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