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국민건강보험공단 사옥.
2004년 처음 파업 없이 단체·임금 협약 체결
통합 출범 하루 전인 6월30일 오후 2시 반경, 당시 박태영 공단 이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노조원들에 의해 서울 마포구 염리동 공단건물 6층에 사실상 감금됐다. 6층을 벗어나려는 공단 임원진을 조합원들이 제지하는 과정에서 우발적 충돌도 벌어졌다. 노사 간엔 거친 막말이 오갔다. “×새끼, 싸가지 없는 ×.” “나갈 수 없어, ×××들아.” 이후 공단 노사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극한 대립이 이어졌다.
공단은 한때 한국병의 상징인 갈등 해결 문화의 부재와 조악함을 응축한 곳이었다. 대화와 협의는 없었고, 대결과 반목은 불신의 골을 깊게 팠다. 누적된 적자와 그로 인한 보험료 인상으로 국민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수가를 둘러싼 이익단체들의 밥그릇 싸움을 제대로 조율하지도 못했다. 또 상쟁(相爭)의 노사관계 때문에 ‘상시 파업 공공기관’이라는 닉네임을 얻었고, 국민들에게 ‘불편만 주는 조직’이라는 질타를 받아야 했다.
이런 공단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상생(相生)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공단은 최근 의료소비자, 의료계, 정부, 공익대표가 2005년 보험료·수가(의료계에 지급되는 진료행위 가격)·보험급여 범위를 합의 처리하는 대타협을 이뤄내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한 것. 이번 대타협은 공단 출범 이후 사상 처음으로 의료공급자와 의료소비자가 사회적 합의를 일궈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대결과 반목으로 점철되었던 자리를 대화와 협의가 대신한 것이다.
이성재 이사장.
이성재 공단 이사장은 2003년 6월 취임하면서 “상처가 많은 조직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공단 안팎의 환경이 최악이었기 때문. 고민 끝에 나온 해결책은 간단했다. ‘상호 대화와 협력을 통한 상생’이 그것.
이성재 이사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관련 단체들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1조5000억원의 보험 급여 범위를 확대하면서도 수가 인상을 억제해 보험료 인상폭을 2%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두 달여에 걸친 물밑대화 과정에서 이 이사장은 목이 타 들어갔다. 합의가 거의 이뤄졌다가도 삐걱거리기를 수차례. 의사협회와 약사협회 등 의료공급자 단체마다 처지가 달라 이해 단체의 서로 다른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은 지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주사위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로 넘어갔다.
노사 앙금은 여전 … 해고자 복직 문제로 ‘시험대’에
이런 과정을 거쳐 사상 처음으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대타협을 이뤄낸 결과가 △직장 및 지역가입자 건강보험료 2.38% 인상 △수가 2.99% 인상 △건강보험 급여 1조5000억원 확대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처음으로 합의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좋은 전례를 남겼다”면서 “수가 인상 규모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건강보험 급여 범위 확대가 이뤄진 것에 대해서는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보험 적용이 안 돼 가입자들의 불만을 들어왔던 MRI(자기공명영상), 간 절제 수술시 필요한 인도사이아닌그린 검사(약제 포함), 인공와우, 두개강내 신경자극기, 조혈모세포수집용 키트 등이 보험 급여 대상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반면 약사협회 관계자는 “예년보다 협상이 일찍 타결된 점에선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수가 인상 규모가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국민건강보호법은 매년 11월15일까지 다음 연도 진료비 지급 규모를 결정하는 수가를, 가입자를 대리하는 공단 이사장과 의료계 대표자 간에 계약을 맺어 결정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 단 한 차례도 계약은커녕 실질적인 협의조차 이뤄진 적이 없었다. 계약이 이뤄지지 않으면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실련 등 가입자단체와 의료계 공익위원 등이 참여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수가 등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으나,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이 불참과 퇴장을 반복하면서 2003년까지 매해 파행적으로 처리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의 합의는 비록 공단과 의료계가 법이 정한 기간 안에 직접 계약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합의 노력과 협력 정신을 쌓은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적절한 수준으로 의사 약사들에게 줄 돈을 책정하고 국민들에게 더 많은 급여를 지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에게 원가 분석을 의뢰하는 등 사전준비를 철저히 한 뒤 의료계 인사들과의 이견을 좁혀나갔습니다.”(이 이사장)
이번 합의는 공단과 의료계가 10여 차례의 공식 비공식 협상을 거쳐 일궈낸 것이다. 특히 3년간 계속 불참해온 양대 노총이 참여한 가운데 합의가 도출됐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의가 있다. 의료공급자와 의료소비자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건강보험 문제를 푼 첫 사례로 기록된 것이다. 공단과 의료계는 또 10억원의 비용을 갹출해 공정하게 수가를 도출하기 위한 연구에 쓰기로 했다. 가입자들에게 손해를 끼쳐온 소모적인 갈등과 오해를 풀고 상생의 관계를 만들자는 취지라는 게 이 이사장의 설명.
“의료계와 공단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한동안 얼마나 싸늘했습니까. 상생과 협력의 철학이 갈등을 해결하는 키워드라는 걸 다시금 깨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사장이 풀어야 할 숙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대결적 노사 관계의 앙금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4년 사상 최초로 노사간 분쟁 없이 단체협약과 임금협약을 체결한 공단 노사는 현재 대결적 노사 관계의 산물인 해고자 복직 문제로 다시 어긋나고 있다. 상생의 길로 올라서는 고비를 넘고 있는 것이다.
“상시 파업 사업장이라는 과거의 관성과 불명예를 탈피하려는 노조 측의 인내와 노력에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고비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조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었다는 비판도 듣고 있지만, 서로가 한 발짝씩 양보하고 나누는 관행이 정착된다면 파업 없는 생산적 노사 관계를 앞으로도 지속할 수 있고, 이것이 결국 가입자들의 이익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