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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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남편 구하러 ‘이불 속으로’

룻, 시어머니 조언대로 잠자던 보아스에게 접근 … ‘친족간 보호 책임’ 덕에 작전(?) 성공

  • 조성기/ 소설가

    입력2004-04-08 1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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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남편 구하러 ‘이불 속으로’
    한밤중, 보리타작이 벌어진 마당이다. 타작이 채 끝나지 않은 보리들은 여기저기 낟가리를 이루고 있다. 보리 냄새가 물씬 밤공기를 따라 퍼져나간다. 그 낟가리들 옆에 한 남자가 도둑들로부터 보리를 지키기 위해 간이 침상에서 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

    이때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살금살금 남자에게로 다가온다. 여인은 방금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발랐는지 몸에서 향유 냄새가 언뜻언뜻 풍겨 나온다. 남자는 여자가 다가와도 세상 모르게 곤히 자고 있다. 타작을 도운 일꾼들과 맛있게 저녁을 먹고 포도주까지 마신 뒤 거나하게 취한 모양이다. 코고는 소리까지 들린다.

    여인이 남자의 발끝에 걸쳐 있는 이불을 살며시 들치고 몸을 들이밀어 넣는다. 여인이 남자 옆에 나란히 누웠는데도 남자는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여인은 참으로 오랜만에 남자 옆에 누워 남자의 체취를 맡는 것이므로 자신의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간간이 깊은 숨만 내쉰다.

    초봄 밤하늘의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여인은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잠시 회의가 들기도 한다. 이렇게 무작정 외간남자 옆에 몰래 와서 누워 있어도 되는 것인지, 남자가 깨어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여인은 몇 해 전에 죽은 남편의 품에 안겼던 일들을 떠올리며 어둠 속에서 얼굴이 붉어진다.



    이 여인의 이름은 룻이다. 룻은 ‘회복’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름 그대로 이 여인은 몰락한 가문을 회복하는 일을 해냈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 그 땅에 흉년이 크게 들었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기근을 피하여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거기서 엘리멜렉은 일찍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각각 아내를 얻었다. 말론의 아내가 된 여자가 룻이었고 기룐의 아내는 오르바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마저 자식들을 낳기도 전에 객지에서 죽어 집안에는 과부 세 명만 남게 되었다.

    ‘룻’은 ‘회복’이라는 뜻 … 몰락한 가문 회복으로 ‘이름값’

    나오미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땅을 떠나 이방 땅 모압으로 옮겨온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자기 집에 재앙을 내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반갑게도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물러가고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며느리들에게 각자 좋은 남자 만나 잘살라면서 자기 곁을 떠나가도록 하였다.

    그러자 두 며느리는 소리 높이 울며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오미는 다시금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간곡히 말하였다. 결국 오르바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룻만이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성경에서 ‘벧’이라는 말은 ‘집’이라는 뜻이다. ‘벧엘’ 하면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고, ‘베데스다’ 하면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베들레헴도 ‘벧’에 ‘레헴’이라는 말이 더해진 지명으로 ‘떡집’이라는 뜻이다. 그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보리, 밀 농사로 유명한 곳이었다.

    마침 그들은 보리 추수할 무렵에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엘리멜렉 소유의 땅이 있긴 하였지만 농사를 짓지 못해 거둘 게 없었다. 우선은 다른 사람들의 밭에서 보리 이삭을 주워 연명해야만 하였다. 가난한 자들이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는 권리는 레위기 성결법전과 신명기 법전에 명문화되어 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레위기 19:9, 10)

    새 남편 구하러 ‘이불 속으로’

    룻이 몰락한 가문을 회복하기 위해 보아스를 유혹하고 있다.이야기를 나누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위).주운 보리 이삭을 끼고 있는 룻.

    룻은 베들레헴의 유지인 보아스의 밭에 가서 보리 이삭을 주워와 시어머니를 공양하였다. 보아스는 룻의 남편과 시아버지의 가까운 친척으로, 다행히 룻이 이삭을 많이 주워가도록 편의를 봐주기도 하였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 다녀오고 보아스가 룻을 잘 대해준 사실을 알게 된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를 맺어주려고 계책을 짜내었다.

    이스라엘 법전 중 가족법에 해당하는 대목에 ‘고엘’ 제도라는 것이 있다. 친족의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없이 미망인이 된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잇게 해주는 수혼(嫂婚)도 고엘 제도의 일종이다.

    나오미는 자손이 끊어진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 룻과 결혼하여 ‘고엘’을 해줄 남자로 보아스를 꼽고는 룻에게 보아스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룻은 지금 시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보아스가 자고 있는 자리로 가만히 다가가 그 옆에 누워 있는 것이다.

    보아스는 몸을 뒤척이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잠에 곯아떨어져 있다. 보아스가 잠결에 팔이나 발을 뻗어 룻을 안아도 룻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어야만 하였다. 룻은 보아스의 숨결을 느끼고 그 몸이 자기 몸에 닿을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침내 보아스가 자기 옆에 누군가 누워 있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 뜨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누, 누구냐?”

    순간적으로 보아스는 몸을 파는 창녀가 자기를 유혹하려고 타작 마당에까지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미 보아스의 상체는 반쯤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룻은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 누운 채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왜 내가 옷자락으로 너를 덮는단 말이냐?”

    “당신은 저의 남편과 시아버지와 가까운 친척이십니다. 저를 거두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보아스도 평소에 룻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어 보아스 자신이 먼저 나서기가 꺼려졌을 뿐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룻에게 이야기한 뒤 그 친척이 룻을 거두어줄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자기가 룻을 거두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주위 눈 피하려고 한 이불 속에서 하룻밤

    룻은 감사를 표하고 일어나서 타작 마당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때 보아스가 룻을 말리며 말했다.

    “이 한밤중에 어디를 가겠다는 거요? 새벽 미명에 사람들이 서로 알아보지 못할 때 타작 마당을 살짝 빠져나가시오. 그때까지는 여기에 그대로 누워 있으시오.”

    보아스는 이불이 자신의 옷자락인 양 이불 한 끝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새벽이 올 때까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성경에서는 룻이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 있었다고 했는데, 발치에서 웅크린 자세로 있었다는 말이다. 어떤 자세로 있었든 한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으니 ‘나란히’ 누워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비록 성관계는 맺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숙한 남녀가 한 이불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은 성관계를 했을 때보다도 더한 떨림과 흥분을 안겨준다. 아마도 두 사람은 두근거리는 서로의 심장을 느끼며 새벽까지 꼬박 뜬눈으로 지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애틋한 에로티시즘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독일의 문호 괴테는 룻기를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완전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보아스와 룻의 사이에서 이새가 태어나고 이새에게서 다윗이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타작 마당의 그 이불 속에서 새롭게 이루어진 셈이다.

    여기서 ‘이불 속’이라 함은 일반적 의미의 ‘이불 속’과는 그 뜻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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