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1일 홍익대 앞 극장 씨어터제로 배우들이 주변 유흥업소에 밀려 폐관 위기에 처한 극장 현실을 알리기 위해 ‘누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사례2] 3월21일 서울 서교동 극장 ‘씨어터제로’(대표 심철종) 건물 앞에서 ‘누드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검은 천으로 몸의 일부만 가린 11명의 남성들은 순수예술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여를 짊어지고 주변의 유흥업소에 밀려 폐관 위기에 처한 극장의 현실을 알렸다. 경찰측이 풍기문란을 이유로 이들의 행진을 막았지만 이들은 홍대 앞까지 300여m를 행진함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극장이 위기에 처한 것은 지난해 서울시가 홍대 앞 지역에 대해 ‘문화지구’ 지정 계획을 발표한 뒤 인근 부동산 가격이 올라 임대료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씨어터제로는 4월 중순쯤 이 건물을 비워줘야 한다.
예술인 절반 월수입 20만원 이하
위 두 사례는 요즘 기초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문학 미술 연극 고전음악 전통음악 무용 등 기초예술 분야의 위기는 어제오늘 시작된 건 아니다. 이 분야에 대한 일반인들의 홀대는 갈수록 깊어가고 있으며,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불꽃 같은 열정으로 파고들어도 그 세계에서 ‘먹고살 만한’ 극소수에 편입되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다. 나머지 대부분은 궁핍함을 면치 못하는 처지다.
2월 말 발표된 ‘2003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에서는 조사 대상 예술인 1947명 가운데 30.9%가 창작활동과 관련한 수입이 전혀 없었고, 월수입 20만원 이하가 전체의 절반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4월2일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예총)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등 60여개 단체가 ‘기초예술 살리기 범문화예술인 연대’(이하 기초예술연대) 발족식을 열고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시대를 이끌어가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할 문학, 공연, 전통예술 등 기초예술이 현재 이루 말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며 “국민적 문화역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현실에서 기초예술이 위축되는 안타까운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기초예술연대를 출범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300만명이 넘는 신용불량자,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청년 실업률, IMF 체제 이후 몇 년째 불황을 헤매고 있는 경제 여건 속에서 기초예술을 살리라고 주장하는 게 부질없어 보인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예술가의 ‘생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초로서의 예술의 ‘생존’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황석영 민예총 이사장)
기초예술연대는 앞으로 △기초예술의 현황 및 실태조사 △언론매체를 통한 기초예술의 중요성에 대한 캠페인 전개 △기초예술의 중요성 인식 확산과 문화재정 확보를 위한 정부·국회·대통령 방문 추진 등의 활동을 펼 예정이다.
이들이 기초예술연대 같은 모임을 만들어 힘을 결집하고자 한 직접적 계기는 새 문화예술진흥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사장된 데서 시작됐다. 예술가들에 대한 재정 지원에 그친 문예진흥원을 정책기능을 갖춘 자율전문기구인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 법안은 문화·예술단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무엇보다 올해부터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폐지돼 새 지원책이 시급한 데다 로또복권 수익금 등 일부가 문화·예술인들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야가 이 법안을 KBS 수신료 분리안을 담은 방송법 개정안과 연계해 당리당략을 저울질하다가 기한을 넘겨 국회 본회의에 상정도 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황석영 민예총 이사장과 이성림 예총 회장 등이 국회의장을 방문해 직권 상정을 요구했지만 “다급한 민생법안도 아니지 않느냐”는 소리만 듣고 돌아서야 했다.
인사동 화랑가(왼쪽)와 대학로 연극가.
문학의 경우 약 2만명의 문인 가운데 실제로 순수 창작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이는 극소수에 그치는 형편이다. 독자들도 떠나고 있고 작가들은 창작의욕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소설가 전성태씨는 “요즘 작가들은 자긍심이 없다. 작가란 좀스러운 일에 매달려 있는 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 있다. 학생들은 수능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소설책을 보지 않고 어른들은 문학이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전통예술 분야도 마찬가지. 유네스코(UNESCO)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판소리의 경우 관련 인구가 1만여명에 이르지만 11명의 인간문화재를 포함해 연간 정부 지원금이 2억8000만원에 그친다. 해마다 전통예술 관련 대학에서 1000여명의 졸업생이 사회로 나서고 있지만 직업적으로 먹고살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김덕수 신명난생활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시민들의 삶과 전통예술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것을 좁히기 위해선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며 “특히 지역의 전통문화를 살리고 지역민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줘 이웃과 함께 삶 속에서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부 ‘새 예술정책’ 추진 중
4월2일 60여개 단체가 모여 기초예술의 위기의식을 절감하고 ‘기초예술 살리기 범문화예술인 연대’를 발족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소설가 방현석씨는 “삶의 형식과 가치가 분명히 바뀌었음에도 문학을 비롯한 기초예술은 새로운 상상력과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홍승찬 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는 “우리처럼 기초예술계가 난국에 빠진 영국이 요즘 각 학교 직업별로 문화의 개념을 다시 정립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우리도 이번 기회에 차분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다수의 지지를 받지 않으면 설 땅이 없다는 분명한 현실 논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외국의 기초예술 지원은 국내 예술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나름대로 예술가를 재는 잣대를 갖고 최소 생계비를 지원해 예술가가 작품활동을 통해 부가적 수입을 올릴 수 있게 하고 있다. 일본은 창작집이 나오면 공공 도서관 등에서 의무적으로 이를 구입케 하고 있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베트남 몽골 헝가리 체코 같은 나라에서도 기초예술에 대한 지원은 우리보다 나은 편이다.
한편 문화관광부는 순수예술의 진흥을 촉진하기 위해 문인에 대한 직접지원제도 확대, 창작 스튜디오 확충, 공연예술인 생활기반 마련 등 창작여건 조성을 골자로 한 ‘새 예술정책’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기초예술을 사회적 ‘인프라’로 인식하고 관리해나가려는 의지는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 황석영씨는 “관료들의 문제점은 문화예술을 경제 경영 시각으로 본다는 점이다”며 “문화란 투자하면 바로 가시적 결과가 드러나는 게 아닌데도 그것을 기다릴 줄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