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노래자랑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환영하고 있다.
이에 신인인 최거훈 후보(사하을)가 “대표님 약발 좀 많이 넣어주고 가이소”라고 말했고 이어 “잘 부탁합니데이”라는 출마자들의 호응이 뒤따랐다. 이런 출마자들의 요청에 박대표는 2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후보들과 부산의 재래시장을 돌아다녔고 강행군은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전여옥 대변인은 “추미애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이 쓰러졌다고 들었다. 박대표도 벌써 몇 번 쓰러졌을 정도로 고생하고 있지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창당 이후 처음 겪어보는 부산에서의 지지율 열세에 한나라당 후보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해 보였다. 봄가뭄에 애타는 농부들의 표정이 이럴까.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박대표를 향한 후보들의 눈길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박근혜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후보들의 정서는 그들의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박형준 후보(수영)는 “박대표 효과가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매체에 노출되는 빈도가 많아지면서 한나라당의 긍정적 이미지도 높아가고 있다. 박세일 교수 같은 중도개혁 성향의 학자가 선대위원장을 맡은 것도 호재다. 인물 대결로 간다면 한나라당이 확실한 우위다. 하지만 탄핵역풍이 워낙 심해 당장은 박근혜 효과 외에 뚜렷한 처방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정훈 후보(남갑)도 “박근혜 효과가 대단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한나라당에 냉소적이었지만 박대표 취임 후 반드시 찍겠다는 유권자가 적지 않다”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대표님 약발 좀” 박근혜 효과 기대
이런 신인들의 기대와 달리 현역의원 후보들은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김무성 의원(남을)은 “부산에는 호남 사람 비율이 17%다. 그 밖에 외지인도 많다. 박대표 바람이 거센 대구·경북과는 여건이 다르다. 박대표 바람이 일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권철현 의원(사상)도 “부산에서 박근혜 효과가 어느 정도이겠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글쎄, 2~3%라도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해진 부대변인은 “박근혜 효과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탄핵 이후 한나라당을 떠났던 지지자 가운데 상당수는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것이었는데 박대표의 등장으로 그 속도가 빨라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부산에서의 박근혜 효과에 대해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기대를 걸고 있든 아니든 “당장은 박근혜 효과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1990년 3당합당 이후 부산 민심은 단 한 번도 한나라당 이외의 정치세력이 발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도 총선과 지방선거 후보로 여러 차례 부산에서 도전장을 던졌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은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들어설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노대통령의 측근으로 일찌감치 이곳에 출사표를 던진 정윤재 후보(사상)는 “한나라당이 박근혜 효과를 기대하는 것 같은데 박대표가 부산과 무슨 관계가 있나. 오히려 노대통령이 부산 사람 아닌가. 유권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후보는 “과거 총선에서 한나라당 프리미엄이라는 게 있었다. 한나라당을 밀면 ‘김대중 당’도 견제하고,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밀어서 얻을 이익이 무엇인지 시민들도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16대 총선 때 노대통령은 북·강서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바 있다. 당시 노캠프 관계자들은 투표일 며칠 전까지도 노대통령이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후보에 앞서 있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투표 이틀 전 남북정상회담 성사 발표에 부산 민심은 급격히 흔들렸고, 결국 현격한 표차로 패하고 말았다.
4년이 지난 2004년 4월1일 현재 우리당은 정당 지지도에서나 개별 후보 지지도에서나 한나라당에 앞서 있다. 그러나 16대 총선의 경험 탓에 지금의 지지율 우위가 투표 당일까지 이어질 것인가에 의구심을 갖는 관전자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노대통령이 출마했던 북·강서을에 출마한 우리당 정진우 후보는 “16대 때와는 분명히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총선에서 노대통령의 선거참모로 뛰었다는 정후보는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우리당 지지표가 견고하다. 박근혜 효과만으로는 결코 깰 수 없을 만큼 탄핵에 대한 지역의 반발 여론이 강하고 우리당에 대한 충성도도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16대와는 분명히 다른 결과 나올 것”
한나라당이 야심만만하게 추진한 ‘개혁공천’도 선거결과에 영향을 끼칠 한 요인이다. 부산 18개 선거구 가운데 한나라당은 8곳에 신인을 공천했다. 박형준 김정훈 최거훈 김희정(연제) 이성권(부산진을) 이재웅(동래) 박승환(금정) 유기준 후보(서) 등이 그들이다. 부산시 선대위 대변인을 맡고 있는 박형준 후보는 “지금까지 젊은 유권자들이 한나라당을 외면했다. 하지만 이번 개혁공천으로 한나라당도 미래에 투자하는 정당임을 분명히 한 이상 탄핵비난 여론이 가라앉고 본격적인 인물 대결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개혁공천’이 당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악재가 됐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공천에서 탈락한 현역의원이나 당내 경쟁자의 반발 출마로 전통적 한나라당 지지표가 갈라진 곳이 적지 않기 때문. 한나라당에서 야심 차게 신인을 내보낸 곳에서 오히려 약세가 두드러진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선 연제구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한 권태망 의원이, 사하을에서는 박종웅 의원이, 서구에서는 박찬종 전 의원이 각각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한나라당 지지표 분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8곳에 신인을 낸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공천이 늦었고, 또 일부 후보는 지역구를 옮기면서 준비가 늦어져 고전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런저런 효과를 감안해 우리당은 부산에서 최소한 과반 이상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다. 정윤재 후보는 “우리 목표는 부산 1당이다. 아무리 상황이 나빠져도 3분의 1인 6곳에서 당선자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나라당측은 “3분의 2 이상에서 막아낸다면 대성공”이라고 말한다. 3분의 1선을 돌파해 과반 이상으로 약진하겠다는 게 우리당의 목표인 반면, 어떻게든 이 저지선을 지켜내겠다는 게 한나라당의 전략 과제인 셈이다. 그러면 실제 상황은 어떨까.
부산 민심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약간의 편차를 드러낸다. 노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경남 김해와 인접한 낙동강 주변지역에서 우리당의 강세가 두드러진 반면, 바닷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부산 중심가에서는 한나라당도 만만찮은 기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 낙동강 인근지역인 북·강서갑에서는 우리당 이철 후보가 한나라당 정형근 후보에 앞서 있고, 인근 북·강서을에서도 여론조사 결과 우리당 정진우 후보가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 상당히 앞선 가운데 공식 선거전에 들어갔다. 역시 낙동강 인근인 사하을에서도 우리당 조경태 후보가 한나라당 최거훈 후보를 앞선 상황에서 선거전 초반을 맞았다.
낙동강 주변에서 시작된 우리당 강세 현상은 인근 경남 서남부 지역으로도 이어진다. 우리당 부산시지부 한 관계자는 “노대통령 생가가 있는 김해와 주변인 창원, 남해·하동, 통영·고성 등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황색 벨트’가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탄핵역풍 속에서도 한나라당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지역은 바닷가인 해운대·기장 지역으로 이곳 두 선거구에서 한나라당의 현역 의원인 서병수(해운대·기장갑) 안경률 후보(을) 가 지지율에서 앞선 우리당 최인호(갑) 최택용 후보(을)를 비교적 근거리에서 추격하고 있다. 중·동에서도 한나라당 정의화 후보가 우리당 이해성 후보와 엎치락뒤치락 혼전을 벌이고 있다. 역시 송도 해안가를 끼고 있는 서구에서는 한나라당 유기준 후보와 우리당 최낙정 후보 간의 어깨싸움이 치열하다.
이처럼 낙동강변 우리당 우세, 해안가 한나라당 ‘상대적’ 강세 현상에 최근 정동영 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훼발언 등 돌발 요인과 바닥이던 한나라당 지지가 회복되는 추세 등에 비춰 부산 총선은 9대 9로 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의석이 갈리면서 끝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솔직히 과거처럼 한나라당이 ‘우리가 남이가’ 하며 영남을 싹쓸이하는 현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처한 현실도 다르고 민심도 변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당도 절대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9대 9’ 또는 ‘10대 8’ 정도에서 승부가 날 것 같다”고 내다봤다.
우리당에서도 이런 관측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 출마자는 “4월1일 현재 오차범위 내에서 앞서고 있는 우리당 후보의 경우 막판에 뒤집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선거 초반 전 지역에서 우리당 후보가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지만 이런저런 변수를 감안하면 정확히 반으로 나뉘는 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그는 “하지만 한나라당 외에 다른 세력이 발붙일 수 없었던 그동안의 현실에 비춰 그 정도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뿌리 깊은 지역정서와 노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상징성, 탄핵역풍에 박근혜 바람, 그리고 4월1일 돌출한 정동영 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훼발언에 이르기까지 부산 지역 총선은 온갖 정치적 요소가 뒤섞인 가운데 치러지고 있다. 과연 어떤 요인이 선거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고 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