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전 대통령 집안에서 명당발복의 근원으로 여기는 5대조 무덤. 윤 전 대통령의 무덤.윤 전 대통령 선영에 특이하게도 십자형으로 가꿔진 나무(위부터).
실제 명당 덕으로 명문 집안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 설화문학에 등장하는 모티프만은 아니다. 근세의 인물 가운데 이와 관련해 풍수 호사가들이 자주 거론하는 이들도 많다.
호남의 인촌(仁村) 조상과 충청도의 윤보선 조상이 대표적이다. 실제 인촌 조상의 무덤들은 고창 부안 순창 장성 등의 좋은 땅에 자리하여 풍수 답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명당 하나에 무덤 하나(一明堂一墓)’라는 풍수 원칙이 그대로 지켜진 전형(典型) 가운데 하나다.
윤보선 전 대통령 집안은 가문이 흥성한 이유가 조상을 명당에 모신 덕분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윤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의 자서전에 그 내력이 자세히 나와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5대 할아버지는 수원에 살았으나, 집터를 궁궐터로 빼앗기면서 가문이 처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사를 했다(정조 임금의 수원 화성 축성 당시로 추정된다). 어느 흉년이 든 해 5대조는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스님을 구해준 일이 있다. 건강을 회복한 스님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명당 자리 한 곳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스님이 정해준 자리는 나라에서 이순신 장군 후손에게 하사한 땅이었다. 스님은 조언하기를 5대조가 죽거든 일단 이순신 장군 산소 앞에 밀매장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발각되면 죽을죄를 지었다며 사과하고 쓸 땅이 없어 그러니 사람들이 보지 못할 근처의 산속에라도 모시게 해줄 것을 간청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자리가 현재 윤보선 전 대통령의 선영이다.’
그곳에는 윤씨 가문에 명당발복의 ‘근원지(根源地)’가 된 5대조와 후손들의 무덤이 차례로 있다. 이곳을 답사하다 보면 특이한 점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배치의 문제인데, 5대조 할아버지 무덤 위쪽(또는 뒤쪽)에 윤 전 대통령의 무덤이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윤 전 대통령의 무덤과 5대조 무덤 사이에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그 한가운데 십자형으로 나무가 심어져 있다는 점.
흔히 조상 무덤 위쪽에 후손들의 무덤을 쓰는 것을 금기시하기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무덤이 그 조상들의 무덤보다 위쪽에 쓰인 것을 보고 의아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풍수와 무관하게 집안의 합의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율곡도 그의 어머니 사임당 무덤 위쪽에 묻혀 있고, 실제 답사를 하다 보면 명문가의 많은 무덤이 그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잔디밭에 조성된 십자가형 나무다. 이것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자신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윤 전 대통령은 이 선영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윤 전 대통령은 생전에 선영을 자주 찾았으며, 삼복 더위에도 밀짚모자 하나만 쓰고 온종일 잡풀을 뽑는 등 선영을 가꾸었다. 주변에 그늘을 만드는 잡목을 베어내고 잔디를 입히는 등 이곳을 명당으로 만드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집안 형제가 풍수설을 믿고 이곳에 무덤을 쓰면서 선영의 좋은 조경이 망가졌다. 이에 윤 전 대통령은 “앞으로 누구든 이 잔디밭에는 무덤을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잔디밭과 십자가형 나무가 지금도 보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라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자신의 선영에다 미리 자리를 잡아두고 그곳에 안장된 점, 또 5대조 무덤과 자신의 무덤 사이에 더 이상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한 점은 그가 이 땅을 몹시 사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