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7

..

속웃음 참고 ‘입조심 행동조심’

열린우리당 ‘대통령 구하기’ 신중한 행보 … 시위 자제 ‘민생 챙기기’ 총선 압승 읽은 자신감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4-03-18 11:2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속웃음 참고 ‘입조심 행동조심’

    3월12일 탄핵안 가결 직후 울분을 토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왼쪽). 13일 밤 광화문 촛불시위 모습.

    ”당분간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의 상징인 노란 점퍼는 벗을 것이다. 우리당이 앞에 나서면 안 된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구하기 시위를 하면 우리당은 그 일원으로 참석할 것이다.”

    3월13일 밤, 이삿짐을 부리느라 부산스러운 우리당의 서울 영등포 새 당사에서 만난 박양수 조직위원장은 노대통령을 탄핵에서 구하기 위한 우리당의 ‘대책’을 이렇게 설명했다. 입은 다물고 최대한 조용히 국민들 뒤에 몸을 숨긴 채 그 대열을 따라 움직이는 것 이상의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송석찬 의원도 이날 “물리적인 힘으로는 당할 수 없어 탄핵결의안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나설 상황이 아니다. 국민을 믿고 따라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탄핵사태로 엄청난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우리당의 요즘 표어는 ‘입조심 행동조심’이다. 이런 행동수칙은 모든 당원에게 전해졌고 실제 13일 밤부터 탄핵반대 거리집회에는 노란 점퍼를 입은 우리당원들이 사라졌다.

    엄청난 반사이익 … “국민을 믿고 따라갈 뿐이다”

    13일 오전 참여연대, 민주노총 등 500여개 시민·사회단체는 서울 YMCA 강당에서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탄핵사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전국 조직인 ‘탄핵무효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행동’을 결성, 탄핵반대운동의 구심을 자처하고 나섰다. 우리당은 바로 이 500여개 회원단체 가운데 하나로 참여하고 있고 앞으로도 ‘500분의 1’로서만 역할을 할 계획이다. 그러니까 국민 뒤에 숨어서 국민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는 것, 이것이 우리당의 탄핵정국 행동요령이라는 것이다.



    당사 분위기도 확 달라졌다. 12일까지만 해도 분노와 충격에 휩싸여 있었지만 탄핵 반대여론이 우세하다는 여론이 확인되면서 분위기가 밝아졌다. 우리당 내부에서는 “현재의 국면을 한 달 뒤 총선 때까지 이어가는 것이 목표인데, 지금 같아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낙관적 전망도 흘러나오고 있다.

    ‘정신적 여당’임에도 ‘노무현 구하기’ 국민투쟁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는 우리당의 행보는 정동영 의장 등 지도부의 최근 언행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3일 오전 정의장은 노대통령과 이날 아침에 통화한 내용을 공개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는 정겨운 대화가 오갔다는 것이다. 정의장의 한 측근은 “이 통화 내용 공개만으로도 청와대와 우리당의 정신적 교감이 잘 드러나지 않느냐”며 “이 정도 상징적 에피소드만 소개할 뿐 구체적으로 대통령 구하기에 나선다는 인상을 풍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탄핵 규탄시위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는 공세적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특히 우리당이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대외활동에 주력하겠다는 뜻이다. 동시에 정의장을 위기사태 해결에 나서는 지도자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13일 이후 우리당 지도부의 행보에서도 이런 방침을 읽을 수 있다. 우리당은 이날 새 당사에서 ‘헌정수호와 국정안정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발족을 필두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날 오후 정의장 등 지도부가 백범기념관, 조계사, 대한변협 등을 잇따라 방문했다. 정의장의 비서실장인 김영춘 의원은 “탄핵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당분간 지도부가 사회지도층 인사를 만나는 행보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장은 이날 재래시장을 ‘기습 방문’했는데, 정의장 등 지도부의 이 같은 민생탐방 이벤트도 정례화할 계획이다. 여론의 역풍에 우왕좌왕하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과 달리 차분하게 활동하는 우리당 지도부의 모습을 최대한 부각시키겠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뉴스를 만들어내는 우리당 지도부의 움직임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14일 정의장은 경제 5단체장과 만났고, 15일에는 이헌재 경제부총리와도 만나 ‘경제 챙기기’에 힘을 보태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지도부는 이런 대외 이벤트에만 집중하고 가급적 촛불집회 등 대중 집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계획이다. 집회에 참석하더라도 노란 점퍼는 벗고 한 사람의 국민으로 참가한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당의 신중한 행보는 노대통령의 우리당 입당 시기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탄핵사태가 나기 전까지 노대통령의 입당 시기에 대한 우리당의 입장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 개시일 이전이자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설 3월 말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란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면서 노대통령의 입당 시기를 포함한 총선 전략의 전면적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헌법재판소의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 노대통령이 입당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는 않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노대통령이 방송클럽 기자회견에서 한 우리당 지지발언이 탄핵 발의의 단초가 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노대통령의 입당 시기를 놓고 우리당 지도부는 장고에 들어갔다. 3월5일 공식 논평을 통해 “당장 입당하라”며 노대통령의 조기 입당을 요구했던 김근태 원내대표조차 “지금은 국민의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 대통령 입당은 시간을 두고 생각할 문제”라고 말을 바꿨다. 김영춘 의원도 “탄핵안까지 가결된 마당에 입당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물론 ‘정면돌파론’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없지는 않다. 신기남 상임중앙위원은 “국정과 민생안정을 목표로 내건 진정한 여당이라면 노대통령 입당 시기의 유·불리를 따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유재건 의원도 “대통령의 입당이 야권의 당리·당략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한 게 사실이지만 손해를 보더라도 솔직하고 떳떳하게 입당하는 게 오히려 국민의 공감을 살 것”이라며 조기 입당을 주장했다. 김태랑 전 의원도 “대통령 스스로 총선 결과로 심판받겠다고 했으니 일찍 하는 게 옳다”며 조기 입당론에 가세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가 다수 쪽은 아닌 것 같다. 노대통령의 입당 문제의 열쇠를 쥔 정의장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노대통령과의 전화통화 내용까지 공개하며 양측의 유대감을 과시하면서도 정작 노대통령의 입당 시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거듭되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정신을 차리고 (지도부와) 상의해보겠다”고만 말했다. 이런 정의장의 태도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혼란이냐 안정이냐! 열린우리당이 책임집니다.’

    영등포청과물시장 한편의 우리당 새 당사 외벽을 온통 휘감고 있는 현수막의 문구다. ‘여당=안정세력’이라는 논리는 역대 선거에서 집권당이 즐겨 활용하던 슬로건이었다. 민정당, 민자당 등 과거 여당이 즐겨 써온 까닭에 ‘안정세력’은 보수파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에 반해 정치적 소수파는 늘 ‘변화와 개혁’을 앞세웠다.

    정치권에서 우리당을 보수세력이라고 보는 이는 드물다. 오히려 어느 당보다 진보 성향이 두드러지고 최근까지 소수파의 설움을 곱씹던 정당이었다. 그런 우리당이 총선을 앞두고 왜 안정 슬로건을 내걸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승기를 잡은 것이다. 그것도 대승의 조짐을 읽은 것이다. 부자 몸조심하듯 신중한 우리당의 행보에는 이런 자신감이 숨어 있다. 우리당의 한 핵심 당직자의 자신에 찬 어조는 이런 우리당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는 것만큼 확실하게 노대통령을 구하는 묘책이 있는가. 총선에서 우리당이 원내1당이 되는 순간 헌법재판소도 정치적 판단을 내릴 것이다. 총선 승리의 조짐이 보인 이상 더욱 차분하고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느닷없이 안정세력을 표방한 우리당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듯한 요즘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