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에서 눈물을 보인 광고로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한 노무현 대통령.
오래 전부터 많은 정치인들은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기 위해 무던히 애써왔다. 그러나 대중의 감성이란 자칫 독이 되어 그것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했다. 대중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지만 그들을 안전하게 가라앉히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이번 탄핵발의, 대통령의 기자회견, 국회의사당에서의 몸싸움과 가결선포, 그리고 의사당 안팎에서의 항의집회 등 분열과 반목으로 점철된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필자는 우리 사회가 ‘감성독감’에 단단히 걸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감성 바이러스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청문회 스타로 시작하여 ‘비주류’ ‘소수파’ ‘상대적 진보주의’란 자신의 한계를 국민들의 감성을 흔드는 전략으로 극복하려 했고, 또 성공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노대통령의 대선공약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가 기타를 치거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담은 CF는 잘 기억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소수파 대통령이지만 그의 감성공세에 감화받은 열렬한 지지자 덕분으로 지난 1년간 우리 사회의 구태와 권위주의 혁파에 공을 들일 수 있었다.
성공의 경험은 반복적 재생을 낳는다. 그리고 지나친 반복은 부작용을 잉태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감성에 의존하게 되면 이성적으로 충분히 고민한 후 정제된 말을 하기보다는 주관적 감에 따라 느낀 대로 말하게 된다. 그래서 “대통령 못 해먹겠다”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10분의 1이 넘으면 책임지고 사퇴하겠다”는 등 자신을 옥죄게 될지도 모를 말들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말을 해야겠다고 느끼는 순간을 억제하면 자신이 너무도 힘들기 때문이다.
일개 시민, 아니 국회의원 정도가 그런 표현을 했다면 자유롭고 솔직담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공적인 자리에서의 발언은 개인적 취향을 조금은 억누르고 사회적 맥락에 맞춰 해야 했다. 대통령이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자리다. 불행히도 노대통령은 그렇지 못했고 자신의 탄핵이 걸려 있는 자리에서조차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면서 자기 성격대로 돌진했다. 성공의 경험은 습관의 고착을 낳게 마련이다. 그게 비록 나쁜 습관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성공의 경험 반복적 재생 그러나 부작용 잉태
기자회견 중 측근비리에 대한 사과를 완곡히 거부했으며 “좋은 학교 나오고 크게 성공한 분이 시골 사람에게 머리 조아리고 돈 주는 일”이라고 하는 등 감성에 의지한 표현을 반복하여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기도 했다. 또 자신의 지금 처지를 “일류학교 나온 사람들로 잘 짜여진 사회에 돛단배 하나”로 비유하기도 했다.
이 같은 표현은 우리 사회 비주류, 소수파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것과 동시에 반대파의 감성을 자극해 이들을 결집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불가능하리라 예상했던 탄핵 정족수를 훌쩍 넘은 193명의 찬성표였다. 이것 역시 전체 의원들의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노대통령의 감성공세에 휘말린, 우리 사회의 전통적 양대 주류세력인 최병렬과 조순형 야당 대표 역시 과잉감성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서울대 법대를 나온 4선과 5선의 두 정치인은 항상 규범과 원칙을 강조해왔지만, ‘이성’이 마비되고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감성’에 ‘감성’으로 맞섬으로써 노대통령이 져야 할 대부분의 책임을 자신들이 떠안게 됐으며,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정통 보수세력’이란 수식어가 무색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감성이 눈을 뜨고 활동하면 이성은 그 기능을 잃는다. 그리고 국민들은 불안해진다. 이번 탄핵정국에 대한 손익계산으로 각계가 분주하다. 정치적으로는 어느 한쪽이 이득을 얻게 될지 모르나, 국민들 마음속에 새겨진 정치에 대한 불신, 감정의 생채기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치인에게는 선거의 승리보다도 나라의 안정이 가장 큰 의무란 ‘이성’의 목소리를 무시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