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웨그만 ‘신데렐라(신랑, 신부)’ (1993년)
경복궁 돌담길 옆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동물우화집’ 사진전을 보다 보면, 이렇게 새처럼 웃고 싶어진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로 짐짓 뻐기며, 그러나 외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동물이라는 동반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동물들도 우리처럼 웃고 울면서 세상을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싶다.
36명의 사진작가들이 찍은 81점의 전시작 속에는 무섭거나 다정한, 또는 아름답고 유머러스한 동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물론 사라져가는 동물들, 이미 멸종된 동물들을 통해 환경파괴를 경고하는 사진도 빼놓을 수 없다. 전시 제목인 ‘동물우화집’부터가 멸종된 동물을 합성으로 만들어낸 프랭크 호바의 작품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6월22일까지 대림미술관서 전시
그러나 아무래도 눈길을 끄는 사진들은 재미있는 동물 사진들이다. 예를 들면 중국 작가 양전종의 ‘닭 가족 시리즈’를 보자. 첫번째 사진에는 신혼의 닭 부부가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했다. 닭 신부는 중국의 전통에 따라 붉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두 번째 사진에서는 닭 부부의 사랑의 첫 결실인 병아리가 등장한다. 병아리는 진지한 표정인데 첫 아이를 낳은 부부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서렸다. 마치 첫 아이의 돌잔치를 하는 젊은 부부처럼.
세 번째 사진. 아이가 둘이다. 씩씩하게 커가는 아이들을 앞세운 채 더욱 의기양양해진 닭 부부. 그리고 네 번째 사진. 맙소사! 스무 마리의 손자 병아리, 여섯 마리의 중닭들이 닭 부부의 앞과 양 옆에 나란히 섰다. 남녀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다시 결혼해 손자를 낳는, 평범하지만 엄숙한 자연의 섭리를 사람뿐만 아니라 닭들도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대가족 제도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특성은 중국의 닭에게도 해당하는 것일까.
양전종 ‘닭 가족 시리즈’ (1998년) / 카렌 크노르 ‘예술가, 모델, 비평가, 그리고 관람객’ (1998년)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사진들은 중국 작가들의 작품. 대림미술관의 신민경 큐레이터는 “중국 작가들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중국적인 가치관, 너그럽고도 당당한 여유가 놀랍다”고 말한다. 작가 자오 반디의 작품은 사진이라기보다 만화 같다. 나룻배 위에 앉아 소중하게 아기를 어루만지고 있는 여인. 그러나 여인이 안은 아기는 사람이 아닌 팬더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이게 꿈인가…”라고 중얼거리는 뱃사공은 바로 작가인 자오 반디 자신이라고. 중국을 대표하는 동물인 팬더를 등장시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쾌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재치가 느껴진다.
‘동물우화집’ 전시작 중 압권은 프랑스 작가 카렌 크노르의 오르세이 미술관 시리즈. 작가는 미술관 휴관일에 원숭이들을 데리고 와 전시장에 풀어놓았다. 원숭이들은 겁도 없이 값비싼 조각들 사이를 어슬렁대고 작가는 그런 원숭이들을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 대리석 조각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원숭이를 담은 사진의 제목은 ‘현대미술’. 마치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처해하는 관객의 모습 같다. 점잖은 몸짓으로 조각들을 관찰하는 원숭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의 진지한 표정을 사진으로 다시 관찰하는 일은 관객에게 한없는 유쾌함을 선사한다.
자오 반디 ‘나는 꿈꾸고 있는가’(1999년)
대림미술관측의 설명처럼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은 사진예술의 큰 장점이다. 마음만 먹으면 무한정 복사할 수 있는 사진은 기존 미술의 엄숙함이나 권위가 없는 장르다. 또 굳이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지 않아도 카메라 셔터만 누를 줄 알면 작가가 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참가한 작가들의 약력 역시 물리학, 철학, 문학 전공자에 전직 철도청 직원과 패션모델까지 다양하다.
이 때문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진 전시는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파리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미술관인 주 드 폼 미술관은 내년에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바뀔 예정이다. 국내에도 지난해를 기점으로 해서 대림미술관, 한미갤러리 등 여러 사진 전문 갤러리들이 문을 열었다.
그 이름처럼 유머러스한 동물우화집 사진전.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전시가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사진 속의 동물들은 한결같이 동물 본래의 야성성을 잃은, 박제된 듯한 모습이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동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미 자연을 잃은 동물의 슬픈 운명을 본다. 그것은 동물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람에게도 비극이리라(6월22일까지·02-720-0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