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3월21일 열린 외국인 투자기업 CEO와의 오찬 간담회에서 외국인 투자 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3월20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한미동맹 관계의 중요성 등 제반 요소를 감안해 미국을 지지하는 게 우리 국익에 부합한다고 설명한 것은 국제 금융시장의 움직임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외에서 반전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알지만 국익을 위해 ‘전략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라크전 파병 결정으로 외평채 가산금리 급락
다행히 이라크전 파병 결정 이후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이하 외평채)에 대한 가산금리가 크게 하락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가산금리 급등 등으로 그동안 미뤘던 10억 달러 규모의 외평채를 5월중 발행할 예정이다. 외평채 가산금리는 3월 한때 북핵 문제 등 대외 악재가 겹치면서 미 재무부채권(TB) 5년물을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인 1.97%까지 치솟았으나 4월16일엔 발행 이후 최저 수준인 1.13%로 떨어졌다.
포스코는 작년 11월 전체 발행 주식의 3% 수준인 2816억원어치의 자사주를 소각했다. 2001년 8월 역시 같은 규모의 물량 2900억원어치를 소각한 이후 두 번째였다. 작년 자사주 소각 당시 회사측은 “물량 축소를 통한 주가 안정이 소각 이유”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포스코 주가는 포스코측의 기대와는 달리 소각을 완료한 11월22일 11만5500원을 기록한 데 이어 11월28일 12만500원, 12월5일 12만5000원에 마감하는 등 큰 폭의 반등은 없었다.
이와 관련, 당시 포스코 안팎에선 2003년 3월 임기 만료를 앞둔 유상부 회장의 ‘연임’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소각이 이뤄졌다는 얘기가 많았다. 주주총회에서 포스코 지분 60%를 갖고 있는 외국인 주주들의 지원을 받아 연임하기 위해 외국인 주주들에게 ‘서비스’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외국인 주주들의 최우선 관심사가 투자수익인 만큼 주가를 띄우기 위해 자사주 소각을 단행했다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고 인정했다.
위의 두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 투자가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이미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과 금융 자본시장 개방을 합의하면서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다. 증권가 관계자는 “만약 이라크전 파병 동의안이 부결됐다면 외국자본이 국내에서 탈출했을 수도 있다”면서 “자본의 세계화로 각국 정부의 자율성이 대폭 약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물론 외국 투자가들의 ‘힘’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1997년 외환위기 때였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98년 당선자 시절 경기 일산 자택에서 헤지펀드의 거물 조지 소로스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한 푼의 달러’를 위해 온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던 것도 외환위기 직후의 일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경기 일산 자택을 방문한 헤지펀드계의 거물 조지 소로스(오른쪽)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 오양호 변호사는 “사실 외국의 연기금은 위험관리가 엄격하기 때문에 크레스트처럼 SK㈜ 주식을 함부로 매집하기 힘들다”면서 “다만 크레스트의 경우 패밀리 중심의 펀드여서 ‘고위험, 고수익’ 차원에서 SK㈜를 집중 공략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결국 외국의 경우 돈의 성격에 따라 돈을 가장 잘 벌 수 있는 곳으로 흘러가게 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 투자가는 성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전략적 투자가(strategic invester)와 파이낸셜 인베스터(financial invester)가 그것이다. 전략적 투자가란 현재의 자기 사업과 연관성이 있어 시너지효과 등을 위해 투자하는 경우로, 중·장기적으로 주가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대우자동차를 인수했던 미국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가 대표적인 전략적 투자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직접투자가’라고 말한다. 파이낸셜 인베스터란 자신의 사업과 연관성이 없지만 투자기업의 기업가치를 높여 투자이득을 얻기 위해 국내에 들어오는 투자가들이다. 당연히 중·장기적으로 주가에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고,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경영감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국내 증시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직접투자가와 구별해 간접투자가라고 한다. 현재 국내 증시는 외국인이 ‘쥐락펴락’할 정도로 외국인 투자가들의 위상이 절대적이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외국기업들의 한국 투자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외국기업의 최고경영자를 만나 한국 투자를 권유할 정도다. 외국기업들의 직접투자는 간접투자보다 한국에서 자본을 빼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외환위기시 안전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간접투자를 하는 외국인 투자가들의 영향력이 적은 게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펀드 규모가 수십억 달러에 이르고 투자기간도 1년 이상인 A급 펀드들은 국내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 정부가 발행하는 외평채나, 한국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이 발행하는 채권이나 증권의 상당 부분을 소화해주는 것도 결국 이들이다.
이들 A급 펀드를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게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살로먼스미스바니 등 투자은행이다. 우리 정부나 기업들이 이들 투자은행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 투자은행이 A급 펀드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투자은행은 외환위기 이후 앞다퉈 한국시장에 진출, 톡톡히 ‘재미’를 봤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추산이다.
2002년 초 ‘피터 정 사건’도 이런 상황에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미국 투자회사 칼라일그룹 서울지사에서 일하던 피터 정은 ‘한국에서 왕처럼 살고 있다’는 내용의 메일을 친구들에게 보낸 사실이 밝혀져 국제금융계에서 망신을 당하고 사표를 썼다. 이 사건은 한국의 기업이나 금융기관 관계자들이 A급 펀드들을 연결해주는 칼라일그룹과 같은 투자은행 관계자들에게 얼마나 매달렸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외국인 투자가들이 우리 기업에 미친 영향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것은 지배구조 선진화와 투명성 향상. 미국 에너지 기업 엔론과 50대 50 합작법인으로 99년 1월 출범한 SK엔론 관계자는 “엔론 관계자들이 처음에 가장 까다롭게 군 대목은 SK그룹의 다른 계열사와의 거래였다”면서 “심지어 1000만원어치 거래에 대해서도 다른 거래처에 비해 더 싸게 공급해주는 것은 아닌지 일일이 따졌다”고 말했다. 회계분식으로 파산한 엔론이 이런 식으로 나왔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LG텔레콤 관계자는 “LG텔레콤에 투자한 영국 통신업체 BT가 지명한 사외이사는 이사회 의안을 미리 보내 설득하지 않으면 사인해주지 않는다”면서 “과거처럼 이사회를 통과의례로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말했다. 이사회가 실질적으로 회사를 경영하도록 한 회사법 정신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우리 재벌들은 오너가 대표이사를 지명하고 대표가 이사를 선임하는 식이어서 이사회는 형식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진 금융기법을 소개해준 것도 외국인 투자가였다. 96년 무렵 지금은 자산 유동화 차원에서 일반화된 ABS(자산담보부증권) 발행을 처음 추진한 것은 ING베어링 한국지점이었다. 당시 책임자였던 대한투신증권 최원락 감사는 “당시 외환은행이 해외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 빌려준 2억 달러를 담보로 ABS를 발행하려 했으나 국내법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데다 ABS에 대한 인식이 낮아 성공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최감사는 97년 외환위기 두 달 전 새한종금의 5억 달러 ABS 발행이 갑자기 취소된 사실을 지금도 아쉽게 생각한다. 국내 기업 ABS의 경우 보통 미국 뉴욕시장에서 소화하기 위해선 현지 기관투자가들이 안심하고 인수할 수 있도록 미국 유수의 금융기관으로부터 담보를 받아야 한다. 새한의 경우 미국 모 보험사가 담보를 서주기로 했는데 갑자기 취소해버려 발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최감사는 “당시 새한종금이 5억 달러 ABS 발행에만 성공했어도 외환위기 이후 퇴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투자가들의 힘이 크다 보니 때로는 국내 기업들로부터 불공정 시비가 일기도 한다. 정보통신업계 관계자는 “최근 방한한 제리 양이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을 만났다”면서 “국내 통신업자들은 면담 신청을 해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외국 투자가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만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칫 그런 태도가 국내 업체 차별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