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 구속, SK㈜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설 등으로 최근 SK 직원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위). 대우자동차를 미국 제너럴모터스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헐값 매각’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2000년 3월31일 대우차 해외 매각 반대시위.
“크레스트시큐러티스(이하 크레스트)가 SK`㈜`의 1대 주주가 된 것은 SK`㈜`의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새턴투자자문 김석한 사장)
외국계 펀드인 크레스트가 장내 매수를 통해 SK`㈜`의 최대 주주로 등장한 것을 두고 재계와 시장 관계자들은 극명하게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재계에서는 외국 자본이 국내의 ‘알짜’ 그룹을 노린 것 아니냐면서 외국 자본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다. 총수 일가가 수십년에 걸쳐 피땀 흘려 일궈온 자산 규모 47조원의 재계 서열 3위 그룹을 단돈 1700여억원을 투자해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잘 알려진 대로 SK`㈜`는 SK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작년 말 현재 그룹의 ‘알짜’인 SK텔레콤 지분 19.8%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SK글로벌 37.9%, SK해운 47.8%, SK엔론 50%, SKC 47.7%, SK제약 20%, SK전력 100% 등 SK의 주력 계열사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SK`㈜`만 삼키면 거의 모든 SK 계열사를 손쉽게 장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경영 위축 경제 악영향 vs 대주주가 무슨 상관
삼성경제연구소 김경원 금융실장(상무)은 “크레스트의 SK`㈜` M&A 시도를 계기로 외국계 펀드의 경영권 위협 앞에 어느 기업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기업들이 앞으로 절대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휴자금이 있더라도 이를 투자하기보다는 사내에 쌓아두고 혹 있을지 모를 경영권 공격에 대비할 것이라는 얘기다.
다행히 SK측은 크레스트의 SK`㈜` 경영권 위협에는 대응할 수 있다. 동일 외국인의 지분이 전체의 10% 이상인 회사는 외국인투자촉진법상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분류돼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 제한 대상에서 예외로 인정하는 조항에 따라 SK측의 지분 7.64%가 의결권 제한 대상에서 풀리기 때문. 이에 따라 SK측은 SK`㈜`에 대해 총 17.46%의 의결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어 크레스트의 지분(14.99%)보다는 높아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재계에서는 크레스트측의 또 다른 ‘저의’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SK그룹이 SK텔레콤 주식으로 1조원대 시세차익을 챙기고 떠난 타이거펀드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크레스트에 ‘농락당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타이거펀드는 다른 곳에서 입은 막대한 손실을 SK텔레콤 투자로 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재계는 크레스트의 ‘저의’를 SK텔레콤 경영권을 위협해 SK측에 무리한 요구를 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 상황에서 크레스트가 SK`㈜` 지분을 0.01%만 더 늘리면 이 회사는 전기통신사업법상 외국인회사로 분류돼 이 회사가 갖고 있는 SK텔레콤 지분(20.85%)에 대한 의결권이 절반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이 경우 SK텔레콤 경영권이 위협받기 때문에 크레스트측은 이를 무기로 SK측을 ‘농락’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크레스트의 최고 자산운용 책임자 제인스 피터 씨는 보도자료를 통해 “크레스트는 현재 SK`㈜` 보통주 14.99%에 해당하는 1902만8000주를 보유하고 있다”면서 “더 이상 SK`㈜` 주식을 매입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또 “크레스트는 SK텔레콤의 위상을 변화시킬 의사가 없으며 SK텔레콤 경영에 관여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시장에서는 “SK`㈜`의 대주주가 크레스트든 SK그룹이든 무슨 상관이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결국 누가 SK`㈜`의 기업가치를 더 높이느냐에 따라 평가받아야 한다는 반론이다.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는 “크레스트가 SK`㈜`의 1대 주주가 됨으로써 SK`㈜`는 SK그룹측의 SK글로벌 지원 요구를 거절할 수 있게 됐고 이는 SK`㈜` 기업가치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외국 자본이 ‘약’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크레스트의 이런 방침은 최태원 회장 개인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될 수 있다. 최회장은 올 3월 약 3000억원에 이르는 본인 소유의 SK그룹 계열사 주식 전부를 채권단에 담보로 제공했다. 채권단은 “SK`㈜` 등 SK그룹 계열사들의 SK글로벌 지원이 전제되지 않는 한 SK글로벌 정상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어서 최악의 경우 최회장은 SK그룹에 대한 지배권을 잃을 수도 있다.
크레스트의 막대한 평가차익에 대해서는 ‘국부 유출’ 시비가 일고 있다. 크레스트가 SK`㈜` 주식 1902만8000주를 확보하기 위해 들인 자금은 모두 1768억원. SK`㈜`의 4월18일 현재 종가가 1만1000원인 점을 고려하면 20여일 만에 약 325억원의 평가차익을 올렸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아직 장부상의 미실현 이익이긴 하지만 그만큼의 국부가 유출된 셈”이라고 말한다.
반면 시장에서는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란 말이냐”는 반응이다. 국내 한 증권사 관계자는 “타이거펀드가 SK텔레콤 주식으로 1조원을 벌었을 때 SK그룹의 다른 계열사들도 SK텔레콤의 주가 상승으로 타이거펀드 못지않은 평가차익을 올렸듯이 SK`㈜` 주가 상승으로 크레스트뿐만 아니라 SK`㈜` 주식을 보유한 SK그룹의 다른 계열사들도 평가차익을 거두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크레스트 쇼크’는 노무현 정부 재벌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 재벌그룹 임원은 “외국계 투자 펀드나 외국 기업은 국내 기업의 주식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데 반해 국내 기업은 출자총액 제한 제도 때문에 주식 취득에 제약을 받고 심지어 보유중인 주식에 대한 의결권마저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출자총액제한 제도는 외국인이 총수의 지배력이 약한 국내 기업을 공격해 돈을 버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계의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공정거래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출자총액 제한 제도가 없었다면 SK그룹은 순환출자를 통해 전 계열사를 선단식으로 강력히 묶었을 것이고 이 경우 SK글로벌 분식회계 파문이 SK그룹 전 계열사로 파급됐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도이치방크 한국지점 본부장을 역임한 정정태씨(현 티지코프 대표) 역시 “크레스트는 금융자본이라는 점에서 출자총액 제한 제도 폐지보다는 국내 기관투자가들도 크레스트처럼 돈의 흐름을 좇아 자유스럽게 투자할 수 있도록 분위기나 제도를 마련해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정대표는 이어 “국내에서는 기관투자가들이 주식을 장기 보유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SK`㈜`처럼 눈에 뻔히 보이는 투자처도 놓치게 된다”고 덧붙였다.
새턴투자자문 김석한 사장은 “만약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이 크레스트처럼 SK`㈜` 주식을 매집했다면 국내에서 어떤 반응이 일었을지 생각해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SK`㈜`의 경우 웬만한 사람이라면 지배구조를 선진화해서 투명성을 높이면 주가가 올라가게 돼 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이런 상황에 김정태 행장이 투자수익을 올리기 위해 SK`㈜` 주식을 매집했다면 사회적 비난과 압력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관계자들은 이제 ‘외국 자본이 약이냐, 독이냐’를 따지는 논쟁은 비생산적이라고 말한다.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는 “외국 자본의 성격이 어떻든 이제는 외국 자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이 우리 경제에서 무시 못할 비중과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글로벌 스탠더드’를 충족시키는 등 그들과 눈높이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