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 가는 길은, 조선 최고의 문장가인 연암에 이르는 길이다. 연암은 서울 사람이다. 서울 서소문 근처 야동에서 태어나고, 청와대 옆의 삼청동과 비원 옆의 계동에서 한때 살았다. 그러나 그곳엔 그의 자취가 없다. 그가 은거하며 마음을 두었던 곳은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두메산골, 황해도 금천군(지금은 장풍군) 연암골이다. 고려 때에 목은 이색과 익제 이제현이 살았지만, 그가 처음 찾아갔을 때는 황폐해진 상태였다. 그곳 풍광에 매혹되어 집을 짓고, 연암이라는 호를 취하며 살았다. 그곳뿐만 아니라 연암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장단 송서면도 가볼 수가 없다. 천상 남쪽, 안의 마을로 가야 한다.
경상도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안의초등학교 교정에는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의 뒷면에 “…1792년에서 1796년까지의 5년 동안 선생은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행정가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놓았을 뿐 아니라 평생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자신의 실학을 유서깊은 이 고장에서 실천에 옮겨볼 수 있었으며 대표적인 저작의 대부분을 이때에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고 새겨놓았다.
비석이 서 있는 곳은 관아의 부속 건물이 있던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관아 한 곳에는 2층으로 된 창고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퇴락한지 이미 오래였다. 이에 그것을 철거하여 평평하고 넓은 수십 보(步)의 땅을 확보했다. 마침내 연못을 파고 아래 위로 개울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으니 은연 중 물아일체의 흥취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못가에 집을 짓고 벽돌을 구워 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의 집 짓는 법을 본뜻 것이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쓴 아버지의 전기 ‘과정록’(過庭錄)에 담긴 내용이다. 그러나 지금은 깨진 벽돌 하나 찾을 길 없다.
연암은 안의 마을의 대나무와 아름다운 산수에 퍽 만족하며 지냈다. 나이 55세에 요즘 5급 공무원에 못미치는 현감이 되었으니, 야심찬 사람은 성이 차지 않았을 것이다. 단단히 한몫 챙겨서 빨리 뜨고 싶은 한직이지만 연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평생 조그만 집 한 채도 없이 궁벽한 시골과 강가를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제 늘그막에 고을 수령으로 나갔으니 땅이나 집을 구하는데 급급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듣자하니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천리 밖에 있는 술친구와 글친구들을 초대하고 있다니, 문인의 행실이 이처럼 속되지 않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또 들으니 고을 원으로서의 치적 또한 퍽 훌륭하다는구나.” ‘열하일기’를 익히 보아 연암을 알고 있던 정조 임금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요즘 관리라면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 정도 풍류는 허락되었던가 보다. 연암의 처남이면서 평생 지기(知己)였던 지계공 이재성은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안의를 세 차례나 찾았었고, 그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천고의 문장에 대해 마음껏 토론했으니, 당시의 즐거움은 100년의 인생과 맞바꿀 만했다오. 내가 훗날 화림과 같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고을살이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연암과 같은 객을 얻을 수야 있겠소?”
지금 보아도, 안의는 기꺼이 벗을 불러들여 즐길 만한 아름다운 고장이다. 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높이 1200미터 안팎의 기백산과 백운산과 황석산이 안의 3동이라 일컬어지는 계곡을 구비구비 잘 빚어놓았다. 농월정(弄月亭)이 있는 화림동(花林洞), 용추계곡의 심진동(尋眞洞), 신라로 들어가는 백제의 사신을 송별했다는 수승대(搜勝臺)의 원악동(遠樂洞)을 안의 3동이라 하는데, 연암이 왕희지의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본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그 잔이 자기 앞에 이르기 전에 시를 짓는 놀이를 즐겼던 곳도 이 어딘가일 터이다.
정조 임금은 규장각에서 일하던 박제가에게 이런 분부를 내린 적이 있다. “박지원이 다스리는 고을에 문인들이 많이 가서 노닌다고 하는데, 너만 공무에 매여 가지 못하고 있으니 혼자 탄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휴가를 내어 너도 한 번 가보는 게 좋겠다.” 그제서야 박제가는 안의를 방문할 수 있었다. 실학 시대의 한문 사대가로 꼽히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는 연암을 따르고 섬겼다. 이들은 함께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낮을 잊은 채 담소하였다. 정체된 사대주의적 명분론을 떨쳐버리고, 편리한 기구들을 이용하여 살림을 살찌우기 위해서는 오랑캐인 청나라로부터 유용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의 주장을 편 북학파들이다.
이조판서로 있던 친구 유언호의 천거로 50세에 선공감 감역(건축물의 신축과 수리를 맡아보던 종 9품 말단 직책)에 임명되어 처음 벼슬을 하게 된 연암이 독자적인 정치 행위를 하게 된 것은 안의 마을에서 였다. 부임하자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장인(匠人)을 가려뽑아 바람을 이용해 겨를 날리는 농기구, 논에 물을 대는 수차인 용골차, 나무 축이 있는 원통형 수차인 용미차, 물레방아 따위의 기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비문에 새겨져 있듯이, 실학 사상을 실천하던 공간이었던 셈이다.
연암은 그다지 요란하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5년 임기를 거의 다 채우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가 안의를 떠날 때에 백발 노인 십여명이 동구 밖까지 따라나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모르고 있사옵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리워할 것이옵니다.” 몇해 뒤에 안의 사람들이 구리를 녹여 송덕비를 세우려고 했을 때에 연암은 서신을 보내 만류했다. “그런 일을 하는 건 나의 본뜻을 몰라서다. 더군다나 그건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너희들이 끝내 송덕비를 세우려 든다면 집안 하인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숴 땅에 묻어버린 다음 감영에 고발하여 주모자를 벌주도록 하겠다.”
연암이 자주 올랐을 광풍루 2층 누각이 있는 안의 남천가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선정비 속에서 연암의 것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근 200년이 지난 뒤에야, 송덕비를 깨부수러 보내겠다는 하인이라는 말조차 사어(死語)가 된 지금에야 연암을 기리는 비석 하나 이 땅에 섰으니, 그 모양새야 어떻든 가슴 훈훈한 일이다.
경상도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안의초등학교 교정에는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의 뒷면에 “…1792년에서 1796년까지의 5년 동안 선생은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행정가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놓았을 뿐 아니라 평생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자신의 실학을 유서깊은 이 고장에서 실천에 옮겨볼 수 있었으며 대표적인 저작의 대부분을 이때에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고 새겨놓았다.
비석이 서 있는 곳은 관아의 부속 건물이 있던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관아 한 곳에는 2층으로 된 창고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퇴락한지 이미 오래였다. 이에 그것을 철거하여 평평하고 넓은 수십 보(步)의 땅을 확보했다. 마침내 연못을 파고 아래 위로 개울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으니 은연 중 물아일체의 흥취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못가에 집을 짓고 벽돌을 구워 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의 집 짓는 법을 본뜻 것이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쓴 아버지의 전기 ‘과정록’(過庭錄)에 담긴 내용이다. 그러나 지금은 깨진 벽돌 하나 찾을 길 없다.
연암은 안의 마을의 대나무와 아름다운 산수에 퍽 만족하며 지냈다. 나이 55세에 요즘 5급 공무원에 못미치는 현감이 되었으니, 야심찬 사람은 성이 차지 않았을 것이다. 단단히 한몫 챙겨서 빨리 뜨고 싶은 한직이지만 연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평생 조그만 집 한 채도 없이 궁벽한 시골과 강가를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제 늘그막에 고을 수령으로 나갔으니 땅이나 집을 구하는데 급급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듣자하니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천리 밖에 있는 술친구와 글친구들을 초대하고 있다니, 문인의 행실이 이처럼 속되지 않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또 들으니 고을 원으로서의 치적 또한 퍽 훌륭하다는구나.” ‘열하일기’를 익히 보아 연암을 알고 있던 정조 임금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요즘 관리라면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 정도 풍류는 허락되었던가 보다. 연암의 처남이면서 평생 지기(知己)였던 지계공 이재성은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안의를 세 차례나 찾았었고, 그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천고의 문장에 대해 마음껏 토론했으니, 당시의 즐거움은 100년의 인생과 맞바꿀 만했다오. 내가 훗날 화림과 같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고을살이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연암과 같은 객을 얻을 수야 있겠소?”
지금 보아도, 안의는 기꺼이 벗을 불러들여 즐길 만한 아름다운 고장이다. 덕유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높이 1200미터 안팎의 기백산과 백운산과 황석산이 안의 3동이라 일컬어지는 계곡을 구비구비 잘 빚어놓았다. 농월정(弄月亭)이 있는 화림동(花林洞), 용추계곡의 심진동(尋眞洞), 신라로 들어가는 백제의 사신을 송별했다는 수승대(搜勝臺)의 원악동(遠樂洞)을 안의 3동이라 하는데, 연암이 왕희지의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본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그 잔이 자기 앞에 이르기 전에 시를 짓는 놀이를 즐겼던 곳도 이 어딘가일 터이다.
정조 임금은 규장각에서 일하던 박제가에게 이런 분부를 내린 적이 있다. “박지원이 다스리는 고을에 문인들이 많이 가서 노닌다고 하는데, 너만 공무에 매여 가지 못하고 있으니 혼자 탄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휴가를 내어 너도 한 번 가보는 게 좋겠다.” 그제서야 박제가는 안의를 방문할 수 있었다. 실학 시대의 한문 사대가로 꼽히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는 연암을 따르고 섬겼다. 이들은 함께 모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낮을 잊은 채 담소하였다. 정체된 사대주의적 명분론을 떨쳐버리고, 편리한 기구들을 이용하여 살림을 살찌우기 위해서는 오랑캐인 청나라로부터 유용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의 주장을 편 북학파들이다.
이조판서로 있던 친구 유언호의 천거로 50세에 선공감 감역(건축물의 신축과 수리를 맡아보던 종 9품 말단 직책)에 임명되어 처음 벼슬을 하게 된 연암이 독자적인 정치 행위를 하게 된 것은 안의 마을에서 였다. 부임하자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장인(匠人)을 가려뽑아 바람을 이용해 겨를 날리는 농기구, 논에 물을 대는 수차인 용골차, 나무 축이 있는 원통형 수차인 용미차, 물레방아 따위의 기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비문에 새겨져 있듯이, 실학 사상을 실천하던 공간이었던 셈이다.
연암은 그다지 요란하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5년 임기를 거의 다 채우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가 안의를 떠날 때에 백발 노인 십여명이 동구 밖까지 따라나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라 모르고 있사옵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리워할 것이옵니다.” 몇해 뒤에 안의 사람들이 구리를 녹여 송덕비를 세우려고 했을 때에 연암은 서신을 보내 만류했다. “그런 일을 하는 건 나의 본뜻을 몰라서다. 더군다나 그건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너희들이 끝내 송덕비를 세우려 든다면 집안 하인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숴 땅에 묻어버린 다음 감영에 고발하여 주모자를 벌주도록 하겠다.”
연암이 자주 올랐을 광풍루 2층 누각이 있는 안의 남천가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선정비 속에서 연암의 것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근 200년이 지난 뒤에야, 송덕비를 깨부수러 보내겠다는 하인이라는 말조차 사어(死語)가 된 지금에야 연암을 기리는 비석 하나 이 땅에 섰으니, 그 모양새야 어떻든 가슴 훈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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